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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만 단교 과정에 대한 오해와 진실, 그리고 대만의 혐한 감정에 대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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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만 단교 과정에 대한 오해와 진실, 그리고 대만의 혐한 감정에 대해

thezine 2009. 3. 26. 00:02

 요즘 들어 일본과 중국의 혐한류의 뒤를 잇는(?) 대만의 혐한이 조금씩 주목(?)을 받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 한국 야구가 9전 전승을 하며 올림픽 마지막 챔프로 기록되는 장면을 본 한국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생중계를 놓친 사람을 위해서 뉴스에서, 스포츠뉴스에서, 신문 헤드라인에서, 포털사이트 메인페이지에서 실컷 보았을 터.

베이징올림픽 예선경기에서 대만의 혐한 관중



 그때 중계화면에 몇 번 등장했던 저 팻말들은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대충 내용이 짐작은 갔을 것이다. (최소한 '나쁜 내용인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을 듯.) 그 외에 대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만 여성과 연애 끝에 결혼을 하려는데 여자 측 집안에서 '한국 남자는 부인을 때린다'는 생각을 해서 힘들었다는 사람도 몇 있었다. 위 사진에도 등장하지만 개고기 식용이나 성형수술을 빗대 한국을 욕하기도 한다. (중국계 국가가 음식 재료를 이유로 다른 나라를 손가락질한다는 건 좀 난감하다. ^^; 그리고 한국 성형 외과 산업의 경우 국내에서 성형이 명품 가방 하나 사는 정도로 보편화된 건 사실인데 한편으론 중국, 일본의 고객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도 사실.)

 한국 사람에겐 그동안 거의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대만에서 왜 이렇게 혐한 감정을 보이는 걸까? 일본이야 우리가 하도 싫어하니까, 그리고 역사적으로 많이 얽혔던 것을 역사를 모르는 일본인들도 조금은 알기 때문이라 쳐도 지금 젊은 세대에겐 지금껏 별로 엮여본 적이 없는 대만이 그러는 것은 궁금해질 만도 하다.

 나는 대만의 역사책을 읽고 그에 대한 서평까지 썼었지만, 그 당시 내 글에 달린 리플에 다시 리플을 달 때만 해도 대만의 혐한감정의 바탕에는 단교 과정에 대한 배신감 같은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할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대만과의 단교과정, 정확하게는 중국과의 수교과정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중국 수교, 대만 단교

 한국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임기 말이었던 1992년 8월 중국과 정식 수교를 했다. 그리고 곧이어 대만과의 단교가 이어졌다. 당시 중국이 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대만과의 단교였다고 하고 우리나라와의 수교 조건 역시 핵심사안은 대만과의 단교였다.

 노태우 정권은 동유럽, 소련 등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를 성과로 내세우고 있었고 그 피날레를 장식할 중국 수교를 은밀히 추진했다. 중국 수교는 곧 대만과의 단교, 그리고 북한-중국 관계의 악화를 의미했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모두 극비리에 외교회담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데올로기 전쟁이 극심했던 그 시절,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가 끼리끼리만 외교 및 무역을 하던 시절을 지나, 미국도 중국과 수교하는 마당에 한국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었겠지. (이 때를 생각해보면, 중국이 지금보다 훨씬 일찍 개혁개방을 했다면 우리나라가 70-80년대에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경공업으로 시작해 수출산업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중 수교 당시 주변 정세

당시 분위기 자체가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북한과 대만 모두 상황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한국 내에서도 대만을 동맹국가로 인식하고 중국 수교(=대만 단교)를 반대하는 여론이 상당히 강했다고 한다. 수교 추진이 드러날 경우 대만과 북한이 모든 역량을 집중해 중국과 한국 내에서 수교 반대 여론을 조성할 것이었고, 당시 북한과 대만은 각각 중국과 한국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비밀리에 외교교섭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한국과 중국은 수교를 일주일 앞두고 공개했는데, 수교협상 당시 한국의 대만에 대한 입장은 중국을 유일한 정부로 인정하는 한편, 대만에 대해서는 최선의 비공식적 관계를 유지하도록 한다는 조건을 달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한다. 또한 대만과 민간교류, 항공교통망 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도 내걸어 관철시켰다.


한국-대만 단교를 슬퍼하던 한국 화교들




 한국-대만 단교를 슬퍼하던 한국 화교 당시 대만은 이미 수많은 나라와 단교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대만의 자존심을 고려해 대만에 먼저 단교를 선포할 기회를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일부 나라는 경찰을 동원해 대만 외교관을 내쫓는가 하면 미국은 수교하기 겨우 몇 시간 전에 대만에 이를 알려줬다고 한다. 다만 지근거리에 있고 2차대전 후 대만과 관계가 많았던 한국과 일본은 비교적 신경을 많이 썼는데 일본은 단교 열흘 전, 한국은 단교 일주일 전 단계적으로 단교 사실을 알렸다.

 대만 입장에서는 한중수교 소식을 접하고 '한국 너마저...! ㅠㅠ' 하는 비통하고 배신감 가득한 심정이었을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한중수교 절차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 특별히 도의에 어긋난 것은 없고, 오히려 한국 외교관들은 국내의 친대만 정서에 대한 정치적 부담 때문에 대만을 최대한 배려하고 민간 차원의 대만 교류를 보장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회고담을 쓴 당시 외교관의 발언이 편향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잘못한 부분,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도 대체로 담담하게 묘사하는 걸로 봐선 어느 정도 믿어도 좋을 것 같다.)


한국 내 화교들의 상황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화교들은 그전까지 거의 대만을 국적으로 살아왔다. 한국의 화교학교 교재들은 대만의 학교 교과서였고 화교들은 대만의 동요를 배우며 자랐다.(우리나라의 중국어 교육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까지만 해도 대만의 교재를 바탕으로 했다.)

 비록 우리나라 화교의 대부분은 가까운 산동반도(칭따오, 옌타이 등이 있는 곳) 출신들이지만 한국전쟁 이후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대만의 정부만을 중국 합법 정부로 인정했고 이에 따라 한국 화교들도 대만에 기준을 맞추게 된 것 같다. (옛날에 대만을 '자유중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이 기억난다.)

 갑작스런 한중수교 발표에 명동의 대만대사관(곧 중국대사관으로 바뀔 운명이었던 곳) 앞과 곳곳에서 한중수교를 반대하는 한국인과 화교들의 시위가 있었고 당시 상당수 화교들은 중국 본토나 다른 곳으로 쫓겨나거나 타의에 의한 이주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아주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한국, 중국, 대만 관계가 나름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고 당시 협상을 했던 외교관들의 회고담도 공개가 되었지만, 이런 전개를 알 리 없었던 당시 화교들의 불안했을 마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고향도, 타향도 아닌 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알 수야 없지만.)


대만 대사관의 마지막 국기하강식: 쫓겨나듯 떠나야했던 대만인들의 비애를 생각해보면 숙연해진다.




 그런데 사실이 이렇다고 해도 당시 대만에서의 반응은 엄청났다고 한다. 온 국민과 언론은 한국을 배신자로 비판하기 바빴고, 그러다보니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언론에서는 날조된 기사를 만들어서 반한 감정을 돋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한국이 중국에 외화 차관 20억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수교를 했다는 날조된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억측이 나올 만도 했던 게, 당시 무리하게 소련수교를 추진했던 노태우 정권이 소련에 30억달러를 차관으로 제공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돈은 나중에 결국 받지 못하고 군수물자로 대체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대만 혐한의 원동력?
 그러나 당시의 반한 감정은 이미 17년 전의 이야기다. 지금의 대만인들은 혐한 감정을 가진 경우라 해도 단교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제목에도 쓰고 이 단락의 제목으로도 썼지만 사실 대만 혐한 감정의 원동력이 뭔지 단정하진 못하겠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를 들면 다음과 같다.

> 한국-대만의 산업 경쟁 구도
 대만은 아시아의 수출주도형 산업국가로 한국과 종종 비교되곤 했다. 38년이나 되는 계엄령과 국민당 정부의 '백색공포' 정치 속에서 산업을 발전시켜왔고 사회불만을 총칼로 억압하고 자국 시민을 학살한 적이 있는 등, 한국과 비슷한 면이 많다. 한 편으로는 중국과 북한이라는 '적' 앞에 놓인 상황에서 자본주의 국가로서 연대했던 경험도 있다.

 예전에 대만에 갔을 때 우연히 알게 됐던 한국 사람들 중에 현지 LCD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 LCD 제조 장비를 만드는 한국 업체의 직원이었는데 한국 업체의 장비로 LCD를 생산하는 현지 공장에 파견 근무를 하는 엔지니어였다. 그리고 최근 업체간 합병을 하니 마니 말이 많았던 반도체 산업이 있다. 규모와 매출 면에서 수세에 몰려있던 대만의 7개 마이너 업체들이 세계경기 침체 때문에 위기를 겪고 있다는 소식이 경제/국제 뉴스에서 여러 차례 올라왔었다.

 LCD 등 디스플레이는 삼성과 LG의, 그리고 메모리 반도체는 삼성과 하이닉스의 주력 수출품목이다. 모두 일본, 대만의 기업들과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다.


경향신문 관련기사





> 대만 사람들의 친일본 감정
 똑같이 일본 식민 시절을 거친 나라지만 대만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인 것 같다. 대만의 전직 총통이 일본에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정도이다. 중국의 일부로서 중국 본토 세력에 치이고, 공산당에 패퇴한 국민당의 행패에 치이고 학살 사건과 백색공포 정치를 겪은 국민이기 때문일까. 시골섬이었던 대만을 또 하나의 중심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일제 식민지 시기를 차라리 향수(鄕愁)하는 것일까.

 자동차 산업이 없는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만의 거리에 자동차의 대부분은 일본 자동차들이다. 대만 수도 타이페이의 번화가에는 일본계 건물과 백화점이 즐비하고 시골 구석까지도 일본게 편의점 세븐일레븐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 역시 국제시장에서 경쟁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위에 설명한 이유로 반일감정은 별로 없는 반면, 한 때 비슷하지만 그래도 자신들보다 조금 못하다고 생각했던 한국이 여러 면에서 대만을 앞질러 나가는 것이 어떤 대만인들에게는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WBC 한국 경기에 대한 대만 네티즌의 반응(사진 클릭)



 문화적으로는 한국의 가수와 드라마, 영화가 TV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고 한국의 반도체 업체가 세계 반도체 업계의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 대만의 반도체 업체는 도산 위기에 처해있다. 한때 아시아의 강자라고 생각했던 대만 야구는 최약체로 평가받던 중국에도 질 정도로 허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WBC 지역예선에서 졸전을 보인 대만 야구와 달리 한국 야구는 본선에 진출해 많은 경기를 이기고 박빙의 승부로 준우승 고지까지 올랐다.


 한 마디로 말하면 대만의 혐한 감정은 기본적으로 열등감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한국 사람이 이길 수 있든 없든 일본을 때려잡자는 욕망으로 배구, 축구, 야구, 그리고 경제에 몰두하던 것처럼, 대만은 어느샌가 한국을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단교나 대만 언론의 날조된 기사(중국과 대만에서는 석가모니, 손문 같은 사람이 한국 혈통이라고 주장한다는 등의 날조된 기사가 종종 유포되곤 한다. 조선일보 저리가라 할 수준의 날조 실력인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날조 기사의 상당수는 '한국의 조선일보'를 허위로 인용했다는 점이다.)와 버무려져서 현재의 혐한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대만 언론 오보 관련 조선일보 기사



 이 글을 보고 '이 사람은 대만의 혐한에 대해 화나지 않은 척 하는 대만 안티군'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나의 대만 관련 포스트를 살펴보면 상당히 대만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대만 사람들은 우리나라사람 만큼이나 여러 차례에 외세에 휘둘리며 살아왔다. 내가 읽고 서평을 썼던 대만 역사책의 제목이 '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인데 그만큼 자연환경은 아름답고, 그와 반대로 여러 번의 비극적인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는 나라다.


 물가도 그리 비싸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상당히 가까운 데다가(비행기삯이 일본이나 중국과 비슷하다. 거리가 홍콩보다 조금 가까운 정도인 걸 생각하면 상당히 싼 편.) 생각보다 가볼 만한 곳이 많아서 몇 차례 주변 지인들에게 여행지로 추천하곤 했다. (내 말 듣고 여행간 사람은 한 명도 없지만.) 

 대만 사람들이나 대만에 대해 호감을 갖고 또 여행가고 싶은 곳으로 꼽으면서도 대만의 정서나 정치의식을 비판하는 게 언듯 모순되어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지만 뒤떨어진 정치의식을 가진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인간적인 한계조차도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