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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출일기

역사와 함께 사라지는 여행의 기회

thezine 2018. 2. 19. 00:01

19세기 후반, 베를린에서 일본까지 17개월 동안 말을 달리며 대륙과 국가들을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았다는 사람에 대한 글을 읽었다. 태블릿PC, 스마트폰, 보조배터리에 WIFI EGG를 지참하는 요즘의 여행과는 형식 면에서 많이 달랐을 것이다. 말에는 약간의 옷과 신분증과 돈, 일기장과 필기구가 전부였을 것이다. 지금처럼 사진을 찍고 곧바로 페북에 올리고 1-2분만 지나도 좋아요 개수를 확인할 수 있는 여행과는 많이 다르다.


지금이라고 해서 그렇게 여행하지 말라는 법은 없긴 하다.


오래 전에 여행기를 읽으면서 문득, 이제 미지의 세계는 없어진 것 같아 아쉬웠던 적이 있다. 제주도 성산일출봉 한 중간에도 한 때는 사람이 살았다고 하고, 이제는 국립공원으로 보호받는 곳에서 언제는 여행객이 물고기를 잡고 취사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가지고 다니는 장비 목록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근본적인 차이는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행과 지금의 여행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사회활동을 하는 30-40대 직장인의 삶이 시간 여유 많은 demographic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과 많이 다른 점이다.


지금은 그저 아련할 따름인, 책과 영화 비디오에 파묻혀 지내던 사춘기 시절이나, 밤새도록 블로그를 만들던 복학생 시절... 새벽까지 사진과 글과 MP3를 정리하던 중국 어학연수 시절과 같은 여유가 다시 오기는 오는 걸까.


좀 더 멀리 가자면, 스마트폰과 웨어러블 기기를 먹고 자란 나의 아이들의 세대는 과연 그런 정적이고 (그게 싫든 좋든 유익하든 그렇지 않든) 자기성찰적인 시기를 보내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걱정 섞인 궁금함도 생긴다.


지금 중국의 구석진 골프장 리조트에서 한달 가까이 시간을 보내면서 뭔가 뒤처지는 느낌이 드는데, 한 편으로는 꼭 그렇게 치열하게 (지금은 전혀 치열하지 않지만) 사는 것을 지향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멍 때릴 자유를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타고 17개월간 여행하며 얻은 견문으로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었던 어떤 일본 장교의 여행은 한가로운 여행은 아니었겠지만, 일정만 놓고 보면 지금의 출장자들을 경이롭게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다른 일을 하면서 메신저로 소식을 즉시 여러 사람에게 전달하고, 쉽게 사진과 영상과 문서를 공유하고, 잠시 걷는 동안 결재를 승인하는) 그 여행자의 일정은 하루는 '달린다'. 하루는 '식사와 도보 산책과 숙소 주인과의 담소 한다'. 이런 식의 지극히 아날로그적이고 시간 순서대로 하나씩 진행되는 일정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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