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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출일기

역사 취미

thezine 2018. 6. 25. 00:58

제주 시내를 다니다 보면 눈에 띄어서 한 번씩은 보게 되는 곳이기도 하고, 눈에 띄는 것에 비해서 방문객은 많지 않은 곳이다. 제주목관아. 목이라는 행정단위로 제주라는 지역의 관아라는 뜻 같다.

조선시대 제주도지사 격인 제주목사가 근무했던, 지금으로 치면 제주도청 같은 곳.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역대 목사들의 기념비석들도 여기 모아놓았는데, 어쩌면 그 중에 일부는 본인의 공덕을 기리고자 스스로 '휼민비'라 이름 붙인 것들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곳은 제주도에 그리 많지 않은 고건축물이건만 겉으로 보이는 것 외에 안에서 볼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저것 컨텐츠를 채우느라 쥐어짠 것 같은 느낌도 살짝 들고, 여기저기 전시물마다 스피커를 설치해서 튼 음악은 전통음악도 아니고 드라마 OST같다.

전체적으로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서 본 것은 입구 근처 실내 공간에 마련된 터치패널 스크린이다. 제주시에도 옛날에는 한양처럼 도성이 감싸고 있었고, 제주목관아는 도성 안에 있는 시설의 일부였다고 한다. 그렇게 터치패널에 번호를 누르면 하나씩 등장하는 것들 대부분은 저렇게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을 뿐, 실물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어떤 유적지는 번호를 누르면 그 자리였다는 사거리 교차로가 화면에 등장할 정도. (그러고 보면 제주도에는 자연환경은 그래도 중요한 것들은 꽤 많이 남아있는 것 같은데 역사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져버린 것 같다. 목관아 같은 당시로선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던 조그만 건물들의 흔적들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제주도에 숱하게 산재한 조그만 박물관들에 모형으로만 남아있는 걸까?)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 지금 '제주성지'라고 하는 세번째 사진의 장소라길래 컨디션도 좋지 않았지만 터벅터벅 걸어가서 구경을 하고 왔다.

고등학생 시절 역사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다. 맥락 없이 연도 순서대로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을 공부라고 해야 했으니 그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나 말고도 별로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회사에서 단체로 와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곳을 혼자 꼭 가보고 싶어서 가는 것을 보면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보일 테지만 (결과적으로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제주목관아 같은 곳에 가는 이유는 그 곳에 남아있는 역사의 퍼즐들을 읽으면서 나 나름대로 스토리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임금의 임명장을 받고 제주라는 땅에 처음 온 제주목사. 최고의 권력자이자 현지에 대해 무지한 사람. 그를 바라보는 제주사람들, 그가 바라보는 제주 사람들은 서로를 어떤 시각으로 보았을까.

나름 고위직 벼슬아치인데 말이 도지사이지, 당시 교통 수단으로 제주도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가족들과 친지들은 어땠을까. 부인과 자식들은 그래도 같이 갔을까, 임기가 2-3년으로 길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던 것을 보면 혼자 갔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목사가 하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말과 과일과 해산물을 임금에게 대령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역사 문헌에도 진상품을 목사가 직접 검사하고 합격품을 잘 포장해서 한양으로 보내는 그림들이 등장한다. 왜구의 침략과 기근과 태풍에 대한 대비도 잘 해야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왕에 대한 충성심을 잘 어필하는 것도 정말 중요한 일이었을 것 같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만 들었지, 제주에서 한 해에 수백 필의 말을 보낸 것도 목관아의 전시물에서 처음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 같지만 대만과 비슷한 점도 있다. 대만은 중국이라는 문화권에서 변방 중에 변방이었고, 그만큼 근대까지만 해도 본토와는 역사의 결이 달랐다. 제주도는 내륙과 사뭇 다른 환경과 날씨, 거리로 인해 조선이면서도 조선의 다른 땅들과는 많이 다른 곳이었겠구나, 제주 목사는 유배지를 근무지로 발령 받고 썩 마음이 편치 않았겠구나, 현대문명의 도움을 받고 있는 지금과 달리 그 시절 백성들은 비와 바람과 돌 때문에 먹고 살기가 정말 힘들었겠구나. 제주도를 모르는 사람이 목사로 부임해서 현지인들 복장 터지는 일도 많았겠다. 지금처럼 인터넷과 전화가 없던 시절, 제주목사는 자신의 고향과 도성으로부터의 단절감에 남에게 말 못할 외로움과 우울에 시달리곤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 반 상상 반인 무언가가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이번에는 제주도의 골프장을 목표로 삼긴 했지만, 내 취향은 이렇게 지도 보고 걷고 구경하고 앉아서 쉬며 자료 찾아보고 다시 걷고 그러다 뭔가 또 상상 반 생각 반인 무언가를 하는 것.

나에게 역사란 구멍이 송송 뚫린 퍼즐조각을 앞에 두고 상상력으로 빈 자리를 채워나가는 일종의 유희다. 나와 비슷한 감정과 욕구와 한계를 가졌던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어떤 삶을 살았을지, 나의 경험에 비추어, 선이 끊어진 곳에서부터 선이 시작되는 곳까지의 빈 공간에 선을 그려본다. 완전한 상상도 아니고 완전한 사실도 아니기에 재미있는 빈칸 채우기. 사실과 같지는 않을 테지만 완전히 허무맹랑하진 않은 이야기.

다만 단편으로 떠돌아다니는 그런 조각들을 이어붙여 짧든 길든 결말이 있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재주와 끈기가 부족한 것 같다.

아무튼, 그런 기준으로 보다 보면 역사 유적지 구경이 재미가 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미술관은 다녀봐도 그닥 와닿지 않는 것을 보면 원래 취미가 없고 앞으로도 취미가 없을 사람도 많긴 하겠다. 사람의 취향은 정말 가지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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