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중학생 때부터 추석이나 방학에는 책과 영화에 빠져 지낼 때가 많았다. 이사를 한 후 친구가 많지 않던 시절에 몇 안되는 오락거리였으니까. 지금 같으면 컴퓨터에 빠져 지내다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에 상주하며 게임이나 줄창 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컴퓨터를 처음 가진 건 그 뒤로 몇 년이 지난 후다. 아무튼 그땐 대안도 없었다.
영화 보기엔 밤이 좋다. 책을 보기에도 밤이 좋다. 한강변으로 이사오고 볕이 좋은 창가에서 책을 읽으면 좋을 줄 알았는데 한 30분만 지나도 눈이 아파서 오래 볼 수가 없다. (열대 해변가도 마찬가지다. 해변에서 차가운 음료수에 빨대를 꽂고 노트북을 두드리는 프리랜서 같은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이미지일 뿐, 밝은 곳에서 뭔가 집중해서 작업을 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올빼미 생활에 익숙해졌고, 늦은 밤은 나의 오락 시간이며 새벽은 집중력이 사그라져 잠들어야 하는 시간이곤 했다. 그 당시 친구들도 패턴 자체는 비슷했던 것 같다. 방학에, 요즘 같으면 알바, 인턴, 계절학기 등 스펙 쌓기로 1학년부터 바쁘지만 그 땐 뭐... 다들 실컷 노는 시기였다. (내 주변만 그랬을지도.) 다만 아이템이 무언가가 차이점이었을 뿐.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바쁘게 지내던 중에, 지난 주에 한 번 뜻하지 않게 혼자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그땐 만화책방을 찾아보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오늘은 일이 늦게 끝나 늦게 집에 왔는데, 식구들은 모두 자고 있고, 나는 내일 어린이집 휴가라 내가 휴가를 내서 아이를 볼 예정이고, 뭔가 아쉬운 느낌에 책을 볼까, 티비를 볼까, 인터넷으로 오랜만에 글을 쓸까, 그러다 웹서핑으로 소일한 끝에 블로그에 왔다. 오랜만에 스탠드 불빛 속에 글이나 쓰자고 앉았는데 아끼는(?) 스탠드가 못본 사이 모가지가 망가져 있네, 아 -_-
'그래... 우리집은 용산 바로 옆이라 전자제품 고치긴 쉬워...'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예민한 성격을 타고 났지만 무던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긴 버릇이다. 스스로 마음을 편하게 먹는 과정, 일종의 마인드컨트롤인 셈.
오래전에 피씨통신이 유행하던 시절 만들었던 동호회(?)가 있다. 몇 년의 흥망성쇄를 겪고 어느 순간 폐쇄의 길을 걷게 되었지.
동호회가 먼저 문을 닫고 한참 지나 사이트마저 문을 닫았다. 그러기 전에 동호회에 올린 글들을 모두 갈무리해두었는데, 사진도 없이 모두 텍스트들이어서 다 모아서 압축하니 5메가밖에 되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mp3 한곡도 되지 않는 용량이다.
문득 그때 생각이 나서 다시 압축파일을 찾아볼까 했는데 어디에 저장해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네. 찾았다고 해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갈무리 명령어를 친 후에 한참 동안 페이지가 올라가던 화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허구헌날 밤을 새곤 했던 그 시절, 영화, 미드, 일드, 만화, 책, 음악... (지금 생각해보니 책 빼곤 전부 다운로드 받았던 거네) 문화 생활을 정말 해도 너무 많이 했던 시절. 그에 비해 지금은 영화 한 편 보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책 정도는 출퇴근 시간이 있다는 거. 음악은 운전할 때 말고는 잘 들어오지도 않고.
시간이 많이 지난 만큼이나 나의 취향도, 여건도 많이 변했다. 시간은 많지만 볼 영화가 없었던 때도 있었는데 (동생 친구 어머니가 하시던 비디오 가게에 어지간한 건 다 공짜로 갖다 보던 시절) 이젠 천만관객급 영화도 챙겨보기 쉽지 않다. 목구멍이 포도청인건 불변의 진리지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의 비중이 너무 적네.
우연찮게 금요일에 휴가를 내서 애를 보게 됐는데 어쨌거나 3일의 시간이 생겼으니 그 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야겠다.
나우누리 시절에 내가 썼던 무수한 잡글 중에 '본업이 즐거운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놀고 먹는 학생 주제에 그런 말을 했는데 직장 생활을 하던 선배가 장탄식이 느껴지는 리플을 달았던 기억이 난다. 나도 이제 얄짤없는 직장인의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때 내가 했던 말이 지금 와서 새삼 생각거리가 된다. '직업'이란 걸, 단지 '주말을 즐겁게 보낼 수 있기 위해 재미 없어도 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자니, 일에 들이는 시간과 마음씀씀이가 너무 크다. 가족보다도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람들, 공간...
아무튼... 문제는 이직이든 창업이든 뭘 하기에 요새 경기가 너무 안 좋다는 것 ㅎㅎ (요즘 경제부 기자들이 단축키로 저장해놓고 쓰는 듯한 표현인)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마당에 젖은 낙엽처럼 회사에 바짝 붙어 지내야 한다는 말이 이해는 가는데...
요즘, 어느새 서른도 중반을 넘긴 내 인생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이렇게 어영부영, 1년에 몇 번 몇 군데 놀러다니고 주말에 가끔 하루이틀 즐겁게 지낸 것 정도로 '난 괜찮게 지내고 있다'고 자위하며 한 평생 다 보내면, 그때 가서 꽤 우울할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
3일 연휴라는 방학을 앞둔 나의 방학 놀이, 블로그에 글 쓰기도 이렇게 끝! 이제 자둬야 내일 애기랑 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