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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예술평

부인 유씨에게 보내는 편지

thezine 2012. 8. 8. 23:42


4월쯤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었다. 용산미군기지 메인포스트와 사우스포스트 사이를 가르는 길에 있는 전쟁기념관과 착각하고 그 길로 갔다가 다시 턴해서 가는 해프닝 끝에 도착. 그 오랜 옛날 경복궁 앞에 자리했던 중앙청에 중앙박물관이 있던 시절에는 두껍고 묵직하고 어두운 느낌이었는데, 지금의 중앙박물관은 여러 면에서 그보다 훨씬 쾌적하다. 가까이 있는데도, 돈이 그닥 드는 것도 아닌데도 잘 가지 않게 되다니, 참 게으르게 살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뭔가 시간이 아깝고 억울한 느낌?




 오랜만에 올라온 초등학생 조카들을 데리고 간 건데,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나 조카들은 박물관 유물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초등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건 커다란 거북선 모형이라던지, 뭐 그런 거겠지. 유모차 끌고 다니기에는 제법 환경이 좋은 박물관을 거닐다 기부인유씨서를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요즘처럼 서울이 동남아보다 더운 시기에는 박물관 피서가 제격이겠다.)


 기(보내다)부인유씨(유씨 성을 가진 부인)서(편지, 글)의 replica가 전시되어 있고 (replica니까 저렇게 빨간색 싸인펜으로 그어놨겠지?) 전시관 안 벽에는 아래처럼 그 내용이 해석되어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충신불사이군...'으로 시작하는 그 글이었다.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고려의 충신 김주가, 그 길로 징표만을 남기고 중국으로 돌아가, 절개를 지켰다는 이야기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도, 두 지아비를 두지 않는다는 것도 모두 이미 오래 전에 버려진 가치들인데도 그 와중에 이 글을 보고 문득 마음이 움직였다.


 이 몸을 받아줄 곳이 없다는 비장함, 회임한 부인과 태어날 아기에 대한 배려, 부부의 무덤을 생각하는 마음과, 마지막으로 자신의 무덤이 어땠으면 좋겠다는 소소한 바람이 담겨 있다. 무언가 진한 감정이 느껴지는데, 비록 이 시대와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그 오래된 글 속에 담긴 '진정성'에 공감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정말 연기를 잘하는 배우의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연기와 영화에 대한 평가하는 마음은 밀려나고 극의 내용에 동화되는 것처럼, 소리 없이 종이 위에 수백년 간 남아있었을 뿐인 글에 마음이 울릴 수 있다니.


 그 내용에 마음이 울리고, 간결한 한문으로 된 글에서 느껴지는 내재율에 한 번 더 매력을 느끼게 했던 글.


 여담으로, 중국어를 배울 때는 생각못했던 부분인데 아래 한문(글자를 가리키는 '한자'와 구분되는, 문장이나 글을 가리키는 '한문')을 읽으니 이젠 대충 해석이 되서 재밌었다는 점. 문어체라서 (중국어로는 서면어)일반적인 회화체와는 딴판이고 더 어렵긴 한데, 각 한자들의 주된 의미나 쓰는 방식이나 어순 등은 대동소이하다.



 그 전에 썼던 마지막 블로그를 보니 4월이다. 이 사진을 찍은 것도 4월이니 뭐... 근 4개월 만에 처음 포스팅을 하게 되는구만. 글 쓰는 법을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달리면 두뇌도 그를 따라 움직이며 생각을 정리하던 수 많은 밤들을 잊어버리고 지냈구나.


 머릿속 생각이 통에 담긴 반죽이라면, 그 반죽을 쿠키 틀에 잘 담아 내는 것이 글쓰기이고 다 만들어진 쿠키가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죽이 상하기 전에 그때 그때 틀에 부어 구워야 하는데 영 기회가 마땅찮다. 육아와 살림의 부담...ㅎㅎ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바라는 마음만은 잃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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