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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대한 향수(nostalgia)

thezine 2008. 8. 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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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총장 공관

 운동 삼아 산책을 나갈 때면 가까운 서울대에 가곤 한다. 낙성대쪽에서 서울대쪽으로 가면 서울대 기숙사를 지나게 된다. 길을 따라 양쪽으로 교수 아파트, 외국인 학생 기숙사, 일반 학생 기숙사... 다양한 기숙사가 있다. 기숙사 규모만 해도 왠만한 대학 기숙사 10개는 모아놓은 규모는 될 것 같다.

 그곳에서도 눈에 띄는 건물이 있어서 알아보니 서울대 총장 공관이라고 한다. 기존에 있던 공관을 허물고 정운찬 전 총장 시절 지은 건물이다. 공사를 하는 동안 방배쪽의 고급 빌라를 임대해서 지내다가 완공 후 입주했다는 것 같다.

 건물은 겉에서 보기에도 좋아보인다. 아래쪽의 입구 외에 주변은 담장으로 잘 둘러쌓여 있다. 입구에는 경비원이 항상 지키고 있고 철문으로 닫혀있다. 차를 타고 들어간다면 사진에 박힌 글자 중에 'NEWS' 글자 밑으로 해서 건물로 천장이 가려진 공간에 차를 댈 수 있다. 비가 오는 날도 우산 없이 차를 타고 내릴 수 있는 구조다. 일반 호텔의 입구를 떠올리면 된다. 실제로 보면 건물도 멋지게 지었고 조경도 훌륭하다. 보기만 해도 아늑한 느낌이 든다. 주변에는 풀과 나무가 많고 지나다니는 차나 사람도 많지 않아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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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사진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가 본 건축물의 사진이다. 파일명이 delta shelter였는데, 그게 건물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이 건물 역시 건물 아래에 바로 차를 댈 수 있는 것 같다. 1층도 공간이 있긴 하지만 주된 공간은 2, 3층인 것 같다. 훤하게 내부가 들여다보이고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모습이다. 주변 공간의 여백과 눈 덮힌 나무들의 모습은 따뜻해보이는 건물 내부의 조명과 어울려서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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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 미술시간에 건물 모형을 만든 적이 있다. 그리고는 건물 모형에 필이 꽂혀서 건물 투시도를 그린 적이 있다. 지하공간, 지상 1층, 2층, 전체 조감도를 같은 비율로, 같은 방향에서 본 모양으로 엄청난 공을 들여 그렸다. 고2때인가, 여름 방학 보충 수업을 할 때 그 그림을 그리느라 며칠을 보낸 것 같다.(스캔한 자료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보니 없다.)


 그때 건물을 그릴 때 기분을 생각해보니, 중고등학교 때 무수한 미국 영화를 비디오로 보면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떨어져 영 익숙하지 않았던 울산 생활, 그리고 사춘기의 우울한 기분, 그런 중에 밤에 혼자 볼륨을 줄여놓고 영화를 보는 것만이 가장 큰 낙이었다. 동생 친구네 비디오 가게에서 한꺼번에 4-5개씩 공짜로 빌려다가 영화를 보면서 밤을 샜다. 영화를 보다가 졸리면 자고, 잠이 깨면 물 마시고 다시 영화를 봤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돌아다니기도 하다 다시 영화를 보고 또 봤던 시절.

 추운 겨울밤에 이불을 덮고 티비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아늑한 느낌에 잠겨 영화를 보곤 했다. 새벽에 화장실에 다녀와서 옷깃에 남은 추운 공기를 아랫목에서 녹이는 기분도 좋았던 것 같다. 그때 영화 속의 세상은 촌구석에서 성장하는 열 몇살짜리 아이에겐 멋진 신세계였다. 액션영화든, 공포영화든, 주인공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빠르면 90분에서 늦어도 120분 안에 결론을 내고 문제를 해결하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사춘기에 나를 괴롭히던 밑도 끝도 없던 고민과 괴로움을 영화를 보는 동안은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마약처럼 영화 비디오를 보는 일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 속 세상을 상상했고 그 생활들이 언젠가는 나의 것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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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우연히 서울대 총장 공관을 보고, 또 위에 소개한 눈 쌓인 건물 사진을 볼 때 느끼는 무엇이, 사춘기 시절 영화에 빠져들게 했던 느낌과 비슷했다. 나는 건물의 상상도를 그려놓고 그 안에 내가 살고 싶은 집, 내가 살고 싶은 생활(마당에 숯불구이를 위해 살짝 땅이 파여있는, 1층에는 커다란 거실과 빵빵한 음향 시설이 있는)을 그려넣었다.

 내가 그린 건물 그림 속에 쏙 들어가 고민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혹은, 그 건물은 내가 그 당시에 상상했던 이상향이었다. 그 안에서의 삶을 상상하고 그것은 분명 즐거울 거라는 생각을 했다. 마치 겨울밤에 비디오를 보며 영화 주인공의 삶에 내 삶을 대입해보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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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서 우연히 접한 delta shelter인지 하는 건물 사진을 보면 다시 그 때가 생각난다. 정지된 이미지로 된 저 사진 속에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그 속에선 내가 보이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그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눈은 소리없이 내리고 있고, 공기는 귀가 아플 만큼 차갑지만 가슴이 탁 트일 만큼 맑다.

 건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삶을 살고 있고, 그닥 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문득 건축일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할까 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어째 우리나라의 '건축'을 생각하면 일본어로 된 건축용어들과, 이권과 편법, 공무원 술집 접대 같은 것들만 생각난다. 물론 그 중에는 분명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추상적인 건축 작품전 출품작 같은 것 말고, 내가 생각했던 것 같은 현실적이면서도 동화같은 건물을 그리는 사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