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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법

thezine 2009. 11. 23. 22:37



 군대에서 2번 크리스마스를 맞았었다. 지금은 없어진 부산 하야리야 미군부대에 배치받은 건 1998년 12월 23일이었다. 자대에 도착한 첫날 밤이야 누구나 그렇듯 정신없이 신고식으로 지나갔지만 다음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군바리의 마음에도 크리스마스 이브는 특별한 날이었나보다.

 다른 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날이 날이니 만큼 그 날은 신병인 나를 포함한 소대원 모두가 함께 서면에 나가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어쩌다보니 고참들이 모두 나보다 키가 작았는데 그나마 키가 큰 고참의 옷을 빌려 입고 길을 나섰다. (카투사의 첫 휴가 필수 준비물이 '사복'이다. 난 아직 휴가를 다녀오기 전이라 사복이 없어서 빌려입어야 했다.)



 부대 안에서는 눈을 땅바닥에 붙인 듯 아래만 보며 걸어야 했다. 고참들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으니 하루가 넘도록 고참들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면 거리에 나와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법. 게다가 크리스마스 이브, 나름의 파티를 즐기러 나왔으니 특별히 부대 밖에서는 똑같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어찌 어찌 시간을 보내고 다시 부대로 들어올 때는 부대 후문을 통과하면서 다시 눈을 깔았다. 그런데 왕고를 포함한 다른 고참들 모두 그 경계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내가 제 때 '원상복구'를 하지 않을까봐 소대원들 사이에선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기대에 부응하여' 다시 신병의 자세로 돌아오자 고참들이 일순간 활짝 웃으면서 '짜식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하며 농담을 던졌지만, 그들 역시 왕고참의 눈치를 살피던 처지였으니 '아~ 얘가 제대로 해서 다행이다' 하고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군부대에서 부산의 중심가인 서면 시내로 가는 길은 기찻길 위로 놓인 육교와 지저분한 부전시장의 구정물 흐르는 골목을 지나야 했다. 기차길 위 육교에는 부산에서 가장 추운 삭풍이 불고 있었다. 동네 꼬마아이를 보며 '짜식아 너도 언젠간 군대 가야 된다' 생각하던 1998년의 크리스마스.




 그 다음 해인 1999년에는 미군 하사관 학교(PLDC; Primary Leadership Development Course) 입교를 앞두고 부대의 클럽에서 열린 파티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1년 만에 나의 처지가 많이도 달라져 있었다. 사복도 없는 신병의 처지에서 입교를 앞둔 여유로운 상병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2000년의 크리스마스는 드디어 사회에서 맞이하게 됐다. 12월 14일에 전역(현역→예비역; 혹시 '전역'의 의미를 모를 사람을 위해;;)을 하고 27일에는 미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날 참이었는데, 2000년 크리스마스는 즐겨 가던 신촌의 맥주집에서 몇 몇 친구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누군가 '축 전역'이라는 글자도 만들어줬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는 <웨딩촬영+구경하고 도와준 친구들에게 저녁 한 턱+길이 막혀서 공항에 늦을지 모르는 HK양을 공항까지 데려다주고+밤에 집에서 파티> 등으로, 아주 바쁘고 피곤하고 정신없이 보냈었다.



 왜 대한민국의 모든 모텔, 카페, 레스토랑 가격이 크리스마스에만 2배로 비싸지는지, 이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여러 사람을 괴롭히고 있지만, 어쨌든 다시 크리스마스가 찾아왔고, 이번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힘들게 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특별히 외식을 하거나 여행을 가는 경우는 있겠지만, 그러나 앞으로는 크리스마스를 누구와 함께 보낼지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펴~~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