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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출일기

서오릉 가족묘 방문기

thezine 2019. 4. 3. 00:04


집에서 멀지 않아 이 집으로 이사온 이후로 '한 번 가야지' 생각했던 곳. 한 번쯤 가고 싶은 곳으로 '염두'에 둬왔던 곳이다. (염두(念생각 념頭머리 두)라는 말 자체가 '무언가가 늘 생각의 가장자리에 머물러있다'는 느낌이 든다.)

입장에 앞서 방 한칸으로 된 역사관에서 서오릉에 묻힌 왕족들의 소개 글을 읽었다.

그리고 릉을 하나씩 둘러보는데 문득 "내가 지금 (왕의) 가족 묘지를 둘러보고 있는 거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가족묘이긴 하다. 남편과 부부, 누구의 부인, 누구의 어머니...

10대 초반에 시집 와 20살 정도에 일찍 세상을 떠난 왕비, 왕이 된지 1년 만에 죽은 예종, 드라마 주인공으로 여~~러 차례 리메이크된 장희빈, 아들 사도세자가 죽은지 2년 후 세상을 떠난 영빈 이씨...

한 사람의 인생을 두세 문단으로 요약을 한다는 것은(요약이 된다는 것도) 덧없어 보였다.

 (아마도 선망의 대상이었을) 왕족의 일원이 되고도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아들이 뒤주에서 죽는 못볼 꼴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거나 하는 과히 행복해보이지 않는 종말도 덧없어 보였다.

 생각 이상으로 훨씬 정성들여 만든 왕의 무덤이나, 무덤 주변에서 마치 사자의 시중을 드는 듯한 석상 신하와 석상 동물들이나, 무덤 주변의 울창한 나무와 배산과 남쪽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죽은 후에라도 죽은 이들에게, 또는 죽은 이를 떠나보낸 왕족에게 (나도 저런 곳에 묻히겠지) 하는 만족감을 주기는 했을까,

 이곳에 산책온 사람들이야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땅을 보며 마음의 평안을 얻고 돌아가지만 죽은 이에겐 하나도 필요 없는 것들 아닌가.

조선왕조 일가의(여기 말고도 찾아보면 많을 텐데) 가족묘를 둘러보다보니 인생의 덧없음만 새삼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좁아터진 공동묘지에 관리도 잘 되지 않는 채로 묻혀있는 것보다는, 또는 묘지가 오래되어 산 언덕과 구분이 되지 않아 그냥 산의 일부가 되어버리거나 시끄럽고 더러운 것들과 뒤섞여버린다거나 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그 모습을 지켜볼 산 자에게는 위안이 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릉과 릉을 잇는 통로 바로 옆에 울타리가 있어서, 릉을 돌아보다 보면 울타리 바깥의 여러 식당과 카페들을 보지 않을 수 없는 데다 심지어 고기집 고기 굽는 연기까지 서오릉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땅이 좁은 나라에서 극도의 가난과 난개발을 겪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걸까. 릉 안에서도 식당들이 코앞에서 냄새를 풍기는 모습이 씁쓰~~을 하더구만.

500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고 한탄하기 전에, 의구한 산천조차도 막상 찾으려면 눈을 둘 곳이 별로 없구나. 아쉬운 생각이 든다.

여러 모로 인생의 덧없음과 고기집의 보편성을 느낀 산책이긴 했으나 가끔 가볼 만한 곳이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적은 산책을 떠나기에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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