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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쯤, 한국 진보와 보수는 무슨 주제를 놓고 핏대를 세우고 있을까? 본문

시사매거진9356

10년 후쯤, 한국 진보와 보수는 무슨 주제를 놓고 핏대를 세우고 있을까?

thezine 2008. 8. 2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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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젯밤 침대에 엎드려 책을 펼쳤다가 왠지 내키지가 않아서 DMB를 켰다. SKT의 DMB 서비스가 돈이 안되다보니 처음에는 전부 유료이던 것이 지금은 상당수 채널이 무료화되었는데 그 중에는 BBC를 방영해주는 채널도 있다. DMB를 주로 출퇴근 전철이나 회사 화장실에서 소리없이 보는 용도로만 보다보니 BBC는 거의 보지 않는데 거의 처음으로 소리를 켜고 제대로 본 것 같다. (전철에서 소리를 켜고 보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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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어제 우연히 DMB에서 본 BBC 프로그램의 이름은 HARD talk라는 시사인터뷰 프로그램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BBC의 유명 시사 프로그램이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인터뷰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진행자는 왼쪽에 앉은 Stephen Sackur라는 사람이고 과거에 워싱턴DC, 브뤼셀 등에서 BBC의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사람이다.

 BBC의 BBC World News라는 채널과 BBC News channel이라는 채널을 통해 일주일에 4차례 방송한다고 한다. 얼마 전 하야한 파키스탄 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 남아공 대통령 음베키(Mbeki), 영국의 가수 Boy George 등 유명 인사들을 인터뷰했었다고 한다. BBC라는 방송국의 위상에 진행자의 인기, 거기에 전세계에 영어로 방송되는 전파력 덕분에 꽤나 존경받는 프로그램 및 진행자가 된 것 같다.

 (미국에서 유학도 하고 온 손석희氏가 생각났다. 하지만 아무리 손석희가 날카롭고 똑똑하게 진행을 해도 언어 때문에 세계로 진출하긴 어렵겠지. 이럴 때 영어가 무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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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은 HARDtalk에 대한 설명이었다. 위 내용을 잘 보지 않은 분들은 'BBC에서 우연히 시사 프로그램을 봤는데'라는 문장으로 다시 시작하셔도 무방함.

 거의 보지 않던 BBC채널을 본 이유는, 한국사람에게 익숙한 미국 영어만 듣다가 영국식 영어를 듣는 게 재미있기도 했지만 인터뷰 대상자로 나온 사람이 특이하게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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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ert Wilders

 이 사람은 Geert Wilders라는 사람이다. ('기...어트?' 라고 더듬거리며 발음을 고민할 분들을 위해 밝히면 '헤르트 빌더스'라고 한다. 연합뉴스 기사에 나온 한글 표기임.) 간단히 소개하면 한 마디로 '네델란드의 극우 정치인'이다. 자세히 소개하자면 꽤 길다. 이 사람의 주장이나 그간의 행적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비 서방 국가 출신의 이민을 강력하게 규제
 -이스라엘을 좋아하며 친이스라엘 정책 추진, 이스라엘에 40여 차례 방문, 이스라엘 대사관 출신 비서 고용..등
 -시장주의자. 최대한 규제를 없애자고 주장
 -복지 정책 축소, 취소화 주장
 -덴마크에서 이슬람 비하하는 만평 게재 당시 만화가 옹호
 -코란을 비판하는 영화 Fitna(아랍어로 '투쟁')를 웹사이트에 게재
 -테러, 살해 위협을 자주 받고 실제로 암살 기도 몇 차례 발생. 항상 경호원 대동.
 -"무하마드 선지자는 현대에 오면 테러리스트로 체포될 거다."


 위에도 간단히 소개했지만 이 사람은 예전에 덴마크의 어떤 신문 만평이 이슬람을 비하했을 때 이 만화가를 옹호했다. 그리고 코란은 증오와 살인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네델란드의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이슬람에 관련된 언급들을 보면 상당히 '용감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이때 헤르트가 만평을 그린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으로도 분류된다. 일반적인 극우 정치인들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자는 주장을 하기 마련인데 극우가 반-이슬람주의와 결합되고 덴마크 만평 사건을 거치면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이 된 점은 아이러니하다.

 (물론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조중동과 노무현 정부가 맞서면서 한나라당이 언론 자유를 이야기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으니 꼭 먼 나라의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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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 프로그램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Geert Wilders가 출연해서 진행자와 인터뷰를 나눴다. 제목대로 진행 방식이 상당히 hard하다. 이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인사를 나누기 전까지는 인터뷰가 아니라 1:1 맞짱 토론인 줄 알았다.
 
 진행자 Stephen Sackur는 상당히 공격적인 방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예를 들면 "네델란드 국회의 전체 150석 중에 겨우 9석만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당신 당의 정책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고 주장하냐?"고 묻는 식이다.


 질문이 공격적인 때문인지 Geert Wilders의 대답도 종종 가시돋힌 대답이 튀어나왔다. "기분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내가 들어본 중에 멍청한 질문이다.", "난 절대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진행자야 영국 사람이고 기자 출신이니까 당연히 영어를 잘 하겠지만 네델란드의 정치인인 Geert Wilders도 영어로 '두다다다' 빠른 속도로 토론에 가까운 인터뷰에 응할 정도인 걸 보면 확실히 네델란드 사람들이 여러 언어에 능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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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처음 볼 때는 '아... 네델란드에 이런 극우 정치인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나 '꽤 hard하고 흥미로운 인터뷰 프로그램이다'하는 정도의 느낌만 들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듣다보니 한국의 보수와 진보도 언젠가는 비슷한 쟁점을 놓고 격돌하는 날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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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미군=초콜렛 주는 사람'이던 시절도 있었다지


 옛날에 내가 어릴 때 '외국 사람'은 곧 '미국 사람'이었고 또한 '잘 사는 나라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중국인, 중국 동포(조선족), 동남아 출신이 늘어나다보니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슬슬 인종갈등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미국의 대졸 흑인은 영어 강사로 취업이 되지 않고 유럽 출신의 영어도 잘 못하는 백인은 영어 강사로 취업할 수 있는 안타까운 수준의 인종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당장은 이런 3국 출신 외국인이 절대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에 갈등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이들이, 이들의 2세와 3세가 한국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군대에 가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기가 오면 본격적으로 이슈가 될 날도 올 거라 생각한다.

 (물론 지금도 외국인 범죄 현황을 집중 조명한 시사프로그램을 보면서 외국인 노동자들, 비합법 체류자들을 모두 무법지대의 망나니 정도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유럽은 지리적으로(거리), 역사적으로(식민지), 무슬림 이민자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는 반면 한국에서 동일한 갈등이 불거질 가능성은 아직은 낮다. 다만 나 개인이 느끼기에도 상전벽해 수준으로 서울에 외국인이 많아진 걸 보면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인종, 문화간의 갈등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날이 올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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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은 자가발전한다 - theZINE 2장5절 말씀



 우리나라의 보수와 일본의 보수의 주장이 일치하는, 특이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개 보수는 역사적으로 반목해왔던 외부 세력에 적대적이기 마련이고 진보는 그와 무관하게 다양성 확보, 소수자 권리 존중 같은 가치를 주장하는 공통점이 있다.


 네델란드의 대표적인 극우 정치인 Geert Wilders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관련된 내용은 당연히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나는 인터뷰를 들으면서 한국 보수와 진보의,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대립을 상상하고 있었다.


 당장은 진보의 발등에 집채만한 바위가 떨어져서 정신이 없긴 하다. 다만 궁금하다.  '그 때'가 되면 또 어떤 주제로 보수와 진보는 티격태격하고 있을까? 어쨌거나 이 문제가 당장은 남의 일이라는 게 참 다행스럽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이런 갈등을 해소할 역량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 대한민국에서 이슬람계 이민자들이 시위를 벌인다면 거기에다가도 물감 섞인 물대포를 쏘고 연행자 두 당 5만원씩 마일리지를 쌓아주는 식으로 '갈등을 해소'하려 들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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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해소 전담 부대


 네델란드에서 극우 정치인과 그외의 사람들이 반-이슬람 정책을 놓고 벌이는 사회 갈등마저도 '선진국형 갈등'으로 보인다. 보수파가 이민자 차별 및 이민 억제를 주장할 정도라면 이미 상당수의 이민자가 사회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고 이미 상당한 권리가 보장된 상황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외국인이 많아진 속도보다 더 빠르게 외국인이 늘어날 것이고, 갈수록 그들을 '2등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또한 커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한국의 Geert Wilders라고 할 만한 정치가도 등장할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을 위해서라도, 저들의 갈등 해결 과정을 배우는 마음으로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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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자료를 찾는 중에 같은 사진이 여럿 보인다. Geert Wilders의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유명한 사진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