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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지배하는 세상

thezine 2009. 5. 3. 19:54
 다소 과격한 느낌이 들어서 다른 제목을 골라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딱 적합한 표현인 것 같아서 위와 같은 제목을 골랐다.


서태지 앨범 자켓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노래 중에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라는 노래에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 글에 쓰려고 하는 내용은 위 노래와 하등 관계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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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가, 회사에서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고 문득 '양복이라는 옷차림 자체가 서양식인데 왜 이렇게 다들 진지하게 양복을 입고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에 맞는, 혹은 유행에 부합하는, 혹은 어쨌거나 '간지나는' 양복을 논하고 그에 맞는 구두와 시계, 넥타이와 셔츠를 논하는 모습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어떻게 보면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가 보통 입는 '양복'은 아마 영국에서 유래한 복식인 것으로 보인다. 과거 귀족들이 입던 레이스가 달린 화려하고 복잡한 예복을 대체하기 위해 그 당시 기준으로는 더 간편하게 만들어진 옷이고 여기에 보통 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실외에 모자까지 함께 착용했던 것 같다.

이런 거 배워가며 옷을 입어야 한다



 마침 회사에 영국인 동료가 한 명 있는데 배도 나오지 않고 깔끔하고 고전적인 스타일로 양복을 입는다. 이제는 세계 어디서나 예의를 차려 갖춰입는 옷으로는 양복, 패션잡지식 표현으로 하면 수트를 널리 입는 듯 하다. 100년 전쯤에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복장인데 지금은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라면 누구나 옷장에 세트로 몇 벌 정도는 갖고 있는 옷이 된 것. 양복이 영국에서 유래했는지 어쨌는지는 영국인들 스스로도 별로 의식을 하지 않겠지만 가끔은 회사의 영국인 동료가 양복을 차려입는 한국 직장인들을 어떤 느낌으로 바라볼지 궁금해진다.

서양에서 유행하는 동양 문화를 소개한 신문기사


 위의 기사에서 소개한 것처럼 아시아의 문화가 서양에 소개되고 유행이 되거나 아예 익숙한 일부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위에 소개한 것처럼 대부분이 '소비품'의 일부일 뿐이지 생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들은 드물다. (나름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을 꼽자면 중국에서 유럽에 전래된 차(茶)가 떠오른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한반도에서 발명되었고 그것이 중국과 일본에 영향을 주긴 했지만 서양에까지 전래되진 않았다.)

 지극히 일상적인 옷차림 외에도 주변을 둘러보면 하나같이 서양에서 유래한 물건과 문화로 가득하다. 컴퓨터, 자동차(비행기, 자전거)는 근본이 서양에서 유래한 것이고 옷의 경우에는 양복 뿐 아니라 일상복 자체가 서양식 옷차림을 그대로 수입해서 변형한 것들이다. 미국에서 그대로 수입한 식재료가 풍부한 코스트코 같은 곳에는 '쿨한' 먹거리를 찾는 중산층들로 매일 북적인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대교들과 한강 양쪽을 가득 메운 고층빌딩, 아파트들은 서양에서 연구한 건축공학, 기계공학, 역학을 바탕으로 설계되고 서양에서 처음 만들어진 중장비들로 지어진다. (요즘은 여기에 유럽에서 직수입한 인테리어 자재를 사용한 '고품격' 아파트도 늘어나고 있다. 포르투갈산 대리석에 이탈리아산 주방가구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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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란 것은 본디 상호작용을 거쳐 발전해나가는 것이라 한다. 세상 그 어느 나라도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은 끝에 지금의 문화를 갖게 된 곳은 없다. 이웃나라에서 들어온 작물과 물품이 토착화되고 그것이 다시 이웃나라에 영향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문화가 발전한다. 물론, 애시당초 '국가'나 '민족'의 경계선이란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오래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에 나열한 문화적 환경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우리 생활은 '상호작용'이라고 말하기 뭣할 만큼 주는 쪽과 받는 쪽이 뚜렷하다. 어찌 생각하면 양복 문화 역시 서양 내부에서는 더 다양한 복식 문화들 중에 최후에 살아남은 복식 문화이고 이것이 한국이나 중국, 일본과 같은 나라의 전통적인 복식문화를 각개격파해서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한중일 3국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영향을 주고 받은 밀접한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나름의 개성이 뚜렷해서 서양의 복식 문화에 대응될 만한 공통점은 별로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비자 신청 비용이나 비자 면제 절차 등을 상대국가가 자국에 대해 어떻게 하는지에 맞춰서 정할 만큼 자존심을 세우는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도 복장은 양복을 입고 다닌다. (중국인이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게 해주지 않으면 상대방국가도 무조건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식인데, 알다시피 무비자는 국력과 소득수준과 관계가 있다. 중국인들이 한국, 일본, 미국 같은 나라에 무비자로 입국할 날은 그리 금방 오지는 않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매번 번거롭게 중국에 갈 때마다 비자를 받아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이 많은 식기들, 순서대로 용도에 맞게 쓸 줄 알면 나도 고품격 문화인이 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위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 개의 식기가 나오는 서양식 정찬에서 '식기를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걸 보면 교양 수준을 알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학식이 풍부해도 생선용 포크로 샐러드 집어먹으면 말짱 헛것인가?' 라고 면박을 주고 싶어지는 사고방식이다.

 물론 살다보면(특히 호텔 결혼식) 서양식 정찬도 가끔 먹을 일이 있는 법이니 이왕이면 대략적인 사용법은 알아두는 것이 좋지만(그리고 왼쪽에 있는 빵과 오른쪽의 물이 자기 것이라는 '좌빵우물' 같은 약어 같은 것도 함께) 어쩌다 보니 '좋은 것', '우아한 것', '품위 있는 식사 예절'의 기준의 상당수가 서양에서 건너온 것들이라는 불행한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불리하고 불공평한 게임인가. 이것을 비유하자면, 겨우 한두번 접했을 뿐인 옆동네 특유의 고스톱 규칙대로 고스톱 도박판을 벌여야 하는 것과 같다. 정말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좋아도 옆동네 사람들이 대대로 적응해온 규칙대로 게임을 벌여서 승리하기란 쉽지 않다. 전혀 알지 못했던 규칙을 적용하는 바람에 고스톱 결과가 불리해지고 여기에 더해서 '그런 규칙을 모르다니, 매너가 부족하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한다.


 물론 세상이 원래 그렇다. 미시적인 영역에서는 공정함을 실현하기 위해 피터지게 노력하지만 정말 큰 몫이 걸려있는 게임일수록 불공정해지는 것이 세상 이치다. 인구 3억에 육박하고 광대한 토지와 자원, 기술을 갖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나, 러시아, 중국, 일본에 끼어 늘 빡센 역사를 살아야 했던 한국이란 나라나, 공통점이 없는 종족들이 식민제국의 결정에 따라 자로 그은 국경선으로 한 나라로 묶인 아프리카의 나라나 세계 무대에선 1대1로 경쟁을 해야 한다. 미국처럼 가진 것이 많은 나라와 우리나라처럼 가진 것이 많지 않은 나라가 같은 룰로 링에 맞붙는 것이 '공정한 경쟁'이 될 수는 없다.(FTA 찬성론자들처럼, 그것이 '공정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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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세상에서 불공평함은 내재적으로 불가피하다. 위에 말한 고스톱 규칙으로 비유한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그들이 만든 규칙'에 따라 우리는 일상의 게임에 임할 수밖에 없다. 개선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불평은 비생산적이다. 다만 호기심을 가지는 것만큼은 호기심으로서 인정해줘야 한다. 내가 가진 호기심은 이렇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그들이 만든 규칙'에 따라 경기에 임해야 하는 게임이 된 것일까? 그들이 만든 규칙과 하드웨어 속에서 살아가는 문화는 얼마나 독자성을 가질 수 있을까?


 무기력한 패배주의를 연상시킬 수도 있는 생각들이다. 종종, 우리의 노력들이 '발전'이 아닌 '흉내내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의 의문점과 호기심은 딱 거기까지다. 현실을 냉소하고 싶지도 않고 동양이 서양의 문화적 식민지가 됐다는 식의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늘 익숙하고 당연히 여기는 것들의 유래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다보면 한 번은 부딪힐 수밖에 없는, 자각과 관련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