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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thezine 2008. 3. 14.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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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 차례요, Mr.브라운'의 한국어판 표지


 '앤소니 기든스'는 영국의 유명한 사회학자다. 이 사람이 쓴 책을 읽은 건 '이제... 브라운'이 처음이다. 하지만 그가 썼다는 '제3의 길'이 지난 10년간 영국의 집권당이었던 노동당의 정책을 앞서 제시했다는 내용의 글을 통해 그의 이름을 들어본 바 있다.

 이제 오랫동안 영국의 국가 지도자 역할을 해온 토니 블레어가 물러나고 그동안 재무장관을 맡아 일했던 고든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영국 수상이 되었다. 이 책은 정권이 바뀜에 따라 현 상황 하에서 노동당이 어떻게 중도 세력을 흡수할지, 국가 운영의 정채적인 방향을 어디로 할지 등을 제시하는 책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전두환이 집권할 때 훈수를 뒀던 양반이 노태우가 집권할 때 훈수 2편을 해주는 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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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소니 기든스



 어찌 보면 그냥 학자의 한 명일 뿐이지만 그가 처음에 제시했던 '제3의 길'은 실제로 영국의 정책에 많이 반영이 되었고 그 결과 영국은 나름의 번영과 사회 발전을 이뤘다고 한다. 나는 그의 다른 저서는 읽어보지 않았고 이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지만, 아래에서 책의 요점을 소개할 때 알 수 있듯 저자는 그렇게 진보적인 학자라고는 할 수 없다. 내가 '제3의 길'에 대해 읽었던 어떤 기사에서도 '제3의 길'은 그럴듯 한 수사일 뿐 실제로는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것일 뿐이라는 비판 위주였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친절하게도 책의 마지막 장에 요약을 해둔 게 있어서 그것만 다시 한두줄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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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영문 표지



'이제 당신 차례요, Mr.브라운'의 핵심 내용

1. 안정적 경제성장과 지속적인 저물가를 중시하며 보호주의를 멀리한다.

2. 국가의 역할을 일정 부분 강조한다. 하지만 공적 부문의 민영화를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는다.

3. 교육, 의료 같은 분야에서 권한을 이양한다.

4. 기후변화, 환경문제에 중점을 두고 국제 협력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5.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환경세를 도입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6. 평등주의를 명시적으로 강조해야 한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빈곤을 완화하는 것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7. 어린이에게 평등한 출발점을 제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8. 어린이를 위해, 그리고 여성 자신을 위해 여성 지위 향상에 신경써야 한다.

9. 교육제도, 국민건강보험 등은 지속적으로 개혁하고 정부의 통제를 풀어주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10. 사해동포주의를 고양하고 섬나라에 한정된 정체성을 주장하는 우파의 주장을 벗어나야 한다.

11. 유럽 수준에서 협력을 통해 이민을 규제해야 한다. 비숙련 이민을 통제하고 숙련 이민을 장려한다.

12. 사회의 가치관과 법을 준수하는 한에서 다양한 문화를 인정해야 한다. 타 문화도 비판할 수 있는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

13. 범죄에 강경하게, 범죄의 원인에 강경하게

14. 국제 테러리즘에는 국내외적으로 협력하여 대처하되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한 잘못된 행동은 버려야 한다.

15. EU의 일원으로서 기후변화, 에너지 안보, 국제 범죄, 밀입국과 이민 문제 등을 협력하며 해결해야 한다. (EU에서 분리되려고 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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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욱 읽어보니 '평등을 강조해야 한다'는 좌파적인 주장도 있지만(우리나라에서 '평등'을 이야기하면 사회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다.) 대체로 온건 보수에 가까운 주장도 많다. 공공 부문에서 민간으로 권한을 이양하거나 민영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도 있다.
 
 책을 읽으며 종종 느꼈던 것은, 나를 비롯해서 한국에서 '진보적인 관점'을 가졌다고 분류되는 사람들도 사실은 사전적인 기준에 따르면 그저 온건 보수일 뿐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형적인 보수(아래 박스 참고)와 수구적 관점에 물든 시민들이 대세이다보니 온건 보수마저도 급진 좌파로 분류되는 상황이 떠올랐다.


한국의 보수

국방: 병역 면제, 혹은 미국 시민권으로 유사시 해외 도피. 국방은 주로 미국에 의존하고자 함.
경제: 기업이 범죄를 저지르면 '경제가 걱정되서' 봐주자고 한다.
사상: '자유민주주의'를 보호한다면서 인권은 '적당히' 무시한다.
위기: 일제 시대에 친일행위는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므로 재론하지 말아야 한다고 함.

 
 유시민의 강연을 들은 이후로 느낀 것이 있다. 국가 정책을 세우고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방향성에 대해 철학적인, 사회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명제를 정해놓고 그 원칙에 근거해서 정책을 운영해야 한다는 점. 그래서 대통령의 기본적인 정책 운영 방향은 일개 법령을 고치고 제도를 고치는 잡다한 정책을 단순히 모아놓은 수준이 되서는 안된다.

 앤소니 기든스 같은 명망이 있는 학자이든, 아니면 미국의 브루킹스 연구소나 자유기업연구원, 랜드연구소 같은 씽크 탱크든, 일련의 통일되고 상호 일치하는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개별적인 정책은 중구난방이 될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숫자놀음에 불과한 747정책이라던가, 아니면 그때 그때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즉흥적으로 내뱉는 '비즈니스 프렌들리', '노동자 프렌들리'니 하는 문장밖에는 나오지 않는 현정부의 '실용주의'는, 사실은 원칙이 없고 단지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정책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하루에 차량이 220대밖에 통과하지 않는 톨게이트가 있다고 대통령이 언급을 해서 조사해보니 실제로는 그런 곳이 없다던가, 묵은쌀 관리비용이 6천억이니 설렁탕에 밀가루 국수 사리 넣지 말고 쌀국수를 만들어 먹자고 했지만 실제론 묵은쌀이 별로 없다는 에피소드가 그렇다.

 사업하는 아저씨들이 만나서 한정식을 먹으면서 한담으로 나눌 만한 수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정책을 세우는 셈이다. 대통령의 할 일이란 것이 그렇게 근거 없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건 한 건 들쑤시고 그때 그때 대책을 세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 집권을 끝내고 10여년간 집권을 해왔다. 중도를 끌어안기 위해 정책 노선이 바뀌다보니 전통적인 진보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나름의 국가 운영 방침을 세웠고 그것은 앤소니 기든스라는 학자에 의한 '제3의 길'이라는 이론이자 지침에 도움을 받았다.

 미국은 브루킹스 연구소라는, 진보를 대표하는 연구소가 있는가 하면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자유기업연구원, 랜드연구소가 있어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책 철학을 밑받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부는 과연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과연 어떤 철학을 가지고 국정을 바라보는가? 교육, 경제, 환경, 문화, 외교... 여러 분야에 대해 각각의 대원칙은 무엇일까? 앤소니 기든스가 했던 것처럼 분야별로 한 문단 이내로 해당 분야 정책의 기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까?

 유시민이 좋은 부분은 현실 정치인으로서 정치적인 주제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의 큰 틀에 대한 나름의 방향과 철학적 바탕을 정립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는 판단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정도라도 정책 철학을 가진 정치인을 찾기가 그만큼 힘들다.



 한국 정치에 씽크탱크와 정책연구기관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집권 여당이 된 한나라당의 '여의도연구소'의 소장은 '식민지 덕분에 발전했다. 위안부 같은 것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의 수장 '안병직'씨다. 야당은 이나마도 없어서 체계를 갖춘 정책 방향을 제시한 바가 없다.

 한국 정치에 대해 바라는 점은 말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내가 바라는 점을 요약하자면 '정치'가 아닌 '정책'을 보고 싶다는 점이다. 자신이 주장하는 정책을 펴기 위해 정치를 할 수도 있고 정치를 위해 적절한 정책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 둘의 선후관계는 차치하더라도 한나라당이면 한나라당, 민주당이면 민주당, 민노당이면 민노당의 선명한 정책적 지향점을 비교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막연한 선동구호는 무시하고 정책으로 판단하고 정책을 논박하고 지켜내는 정치환경이 되면 자연히 지역정치는 힘을 잃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한국 정치의 주인은 지역당이다. 깃발만 꽂으면 당선인 나라에서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결국 국회의원을 뽑는 것은 각각 지역당의 공천심사 담당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청도군의 군수가 비리로 감옥에 가고 또 다시 한나라당 후보 군수를 뽑고 또 다시 비리로 감옥에 가고 군수를 세 번째 뽑아도 또 한나라당 후보가 뽑히는 현상이 생긴다.

 '아무리 잘못해도 우린 한나라당만 뽑아줄게'라고 유권자가 연이어 신호를 보내주니 정치가들도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 뿐이다. 결국 정치수준은 국민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변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조금씩 느릿느릿 한국 정치가 발전할 거라 생각한다. 한국 정치현실에서 기적적으로 2번의 중도(진보+보수)정권이 탄생했던 것도 그 발전 과정의 일부분이고,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서 퇴행하는 것도 발전 과정의 일부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