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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로부터 도피

thezine 2017. 7. 12. 23:51

낯선 풍경으로의 도피. 퇴근 길 버스에서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이 문득 궁금했다. 로드뷰에서 우연히 보고 찾아보니 이미 몇 년 전 철거된 특이한 건물이 보인다. 지금 지어지는 건물에서는 보기 힘든, 비 전문가가 설계한 듯한 구조와 낡은 모습.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으로 출근하는 저녁 시간, 나는 서울의 숨은 명소(?)를 탐닉했지.


비가 그치지 않을 것처럼 엄청나게 퍼붓더니 거짓말처럼 폭염주의보니 하면서 잊혀졌다. 그래도 조금만 걸어도 신발과 바지가 젖어버리던 그날... 나는 우수(?)에 젖어 감상으로 도피...


평소 피규어를 수집하는 취미도 없지만 핫딜(?)이라는 이야기에 충동적으로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결국 오랜 후지만 충동적으로 결제까지 했다. 어린 시절 재밌게 보았던 스누피 만화를, 아이들은 캐릭터 이름을 외우며 3분 정도 재미있어 했다. 대사가 많지 않고 어른은 목 밑으로만 보여지는 아이들의 세계, 상상과 현실이 섞인 장면들. 어린 시절 몰두했던 재미, 추억으로 잠시 도피하는 값으로 만 얼마 썼다.


한참을 걸어와서 다시 성산일출봉을 올랐다 내려오니 다시 한참을 걸어 돌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난간에 날아와 앉은 무당벌레처럼 숙소로 날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공상으로의 도피, 그리고 마저 비탈길을 내려와 시외 버스로 도피했다. 내릴 곳을 말하면 그에 맞게 달라지는 요금을 교통카드로 결제하는 방식인데, 시외 버스 아저씨는 물정 모르는 관광객에게는 제주시까지 가는 최장거리 요금을 바가지 씌웠다.


며칠 전 폭우가 내리기 전까지 제한급수가 거론될 정도로 가물었을 때, 어떤 낚시터는 물이 말라버려서 낚시터 바닥에 좌대가 내려앉아있었다. 흙탕물과 가라앉은 떡밥으로 진창이었을 저수지 바닥은 그 많았던 과잉 양분과 남은 수분을 빨아들여 금새 초원이 되었지. 저수지에 살던 물고기나 민물새우는 어디로 갔을까. 그들에게 도피할 공간은 있긴 했을까.

 오늘따라 집으로 출근하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마침 아이들 봐주시는 분은 오늘따라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놀아주는 것이 힘들어서 (아마도 반농, 반진으로) '너무 힘들어서 이제 못 오겠다'고, 아마도 혼잣말 같이, 한숨 내쉬듯 그렇게 이야길 하셨나보다. 지칠 때 본인은 그냥 지나치듯 하는 말일 텐데, 역시나 기억력이 좋은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집에 혼자 오기 힘든데', 하며 자못 진지한 말투로 걱정을 이야길 한다. 대책이라곤 없는 나도 마음 속으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그 분에겐 아이 돌보는 일을 그만하는 것이 마지막 도피처가 되는 셈. 누군가에게 도피처, 대안을 생각해보도록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현실이 싫어서 제주도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면 휴가가 끝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할 텐데. 군대 첫 휴가 때 복귀하기 정말 싫었던 것과 반대로, 휴가 복귀도 그리 싫지 않은 그런 일상이 되어야 할 텐데. 나와 나의 가족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을 나를 포함한 누구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꿈일 뿐, 도피처를 꿈꾸는 삶이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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