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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9356

민주주의는 아직 배가 고프다

thezine 2008. 8. 1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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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시즌


 진보주의자들과 기득권에 얽매이지 않은 지식인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예상하지 못한 갖가지 방법으로 민주화를 되돌리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낙하산 사장을 파견하고 고발, 출금, 체포를 통해 길들이는가 하면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대에는 '엄정한 법 집행'을 운운하며 백골단을 부활시켰다. 한편으론 사법부의 솜방망이처벌을 받은 재벌 오너들을 판결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면시키기도 했다.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진보주의자들에겐 쉽지 않은 나날들이다.

 한 때 반성한다던 이명박이 이제는 정부에 동조하지 않는 의견들을 가리켜 '소모적인 갈등'이라고 매도하는 현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무시하고 미래만 강조하는 것을 보면 마치 일본에서 독도에 대한 주권을 침해하고선 '한국은 냉정하게 대응하라'고 하는 것을 떠올린다.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이지, 가해자가 때려놓고 '냉정하게 생각해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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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주의자들은 왜 스트레스를 받는가. 그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민주주의'의 기준에 우리 사회가 아직 많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보수 세력들의 레퍼터리는 거의 비슷하다. '이제 민주주의는 충분히 이루었다. 과거는 뒤로 하고 경제 발전에 매진해야 할 때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기도 어렵다. 문제를 몇 가지 지적해보자면,

1. 한국의 민주주의의 수준은 아직 그리 높지 않다.
 보수 세력들은 이야기한다. 이 민주주의는 자신들이 이룬 것이라고 말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화 운동가들이 피로 일군 것을 가리켜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함께 만들어온 것처럼 이야기할 때가 많다. 그것은 상당수 보수 세력들도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쓴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보수 세력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재벌은 민형사상의 위법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던가, 정부를 비판하면 백골단에 강제 연행 당한다던가 하는 것을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들이 보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미 충분하다. 이제 내줄 만큼 내줬으니 그만 닥치라고 이야기한다. '옛날처럼 끌고 가서 고문하고 죽이고 싶지만 그러지는 않지 않느냐. 이제 그만 좀 요구해라.'

 보수 세력들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충분하다고 믿는 것은, 옛날처럼 밀실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특혜가 오가고 하던 것이 상당수 공개되었고, 이승만 부정선거 같은 드러내놓고 선거부정을 일으키는 일도 사라졌다는 정도를 기준으로 하는 듯 하다. 투표권이 부여되고, 투표/선거가 실시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단순히 투표권이 주어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려던 미국의 시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민주주의란 하루 아침에 옷 갈아입듯 바뀌고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보자들이 수 억씩 들여 공약집을 배포해도 유권자들은 어느 지역 정당인가만을 보고 투표를 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아무런 국민적 합의 없이 밀실에서 FTA를 추진해도 막기가 어렵고, 노가다 출신 대통령이 산 위로 운하를 파겠다고 해도 견제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보수 세력들은 늘상 선진국의 경제적 성과를 단순히 수치로 변환시켜 목표를 추구하기만 할 뿐, 선진국이 그 과정에서 이루어낸 정치적 합의 과정과 민주주의적 성과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보수세력들은 선진국의 경제는 부러워 하지만 선진국의 민주주의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선진국에서 기업에 얼마나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지는 침을 튀기며 소개하지만 선진국의 기업들이 자유로운 기업 활동에 대해 얼마나 엄격한 책임을 지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2. 무엇을 위한 경제 발전인지 이야기해야 한다.
 혀가 짧은 YS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부터 국민들은 '갱제를 살리자'는 말을 이미 10년도 넘게 들어왔다. 경제는 살려야 하는 무엇, 발전해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경제가 발전하는 것인지, 경제가 발전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 여하가 어쨌건 재벌들이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두자. 그러다보면 경제가 성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일반인들의 생활 수준도 덩달아 높아질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동안 경제 발전을 이야기하는 보수파들의 주장이었다. 경제가 성장하고 기업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만 했지 그것이 어떻게 국가 전체의 발전으로, 공익으로 개개인에게 돌아갈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헛소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기업들이 비정규직 제도를 활용해서 일자리의 질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 대기업의 이익은 늘어나고 중소기업은 갈수록 유지가 어려워지는 것, 대기업 총수들의 경제 범죄가 줄어들지 않는 걸 보면 보수파가 말하는 '규제 혁파'가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이 간다. 그것은 윤리와 법률의 한계를 넘어서서 비윤리적이고 탈법적인 경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말과 같다.

 성장지상주의자인 강만수 장관이 한국 경제 정책의 책임자를 맡고 있지만, 그치들의 주장은 단순히 성장만 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될 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우리나라의 성장율 4~5%가 중국 성장율보다 낮으니 한국 경제는 파탄이라고 설레발이를 치고 다니던 조중동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이런 주장을 하는 신문들이 한국 신문 시장 1, 2, 3위라니 참 암담하다.)


 한국은 한 때 동남아 국가들처럼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한 때 지금의 중국처럼 고도성장을 할 때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선택과 집중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 소득이 2만 달러에 이르고 경제규모가 세계 11위~12위인 상황에서는 사회 발전의 목표는 같을 수 없다. (물론, 절대 빈곤 국가였던 한국과 현재의 한국의 경제 정책이 별 차이가 없는 것이 현정부의 철학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경제 문제는 양극화이다. (단순히 파이만 키우면 양극화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에 대해선 뭐...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 대기업 이익이 아무리 증가해도 빌딩 청소부들은 한달 60-70만원의 월급을 받을 것이고, 대기업 생산직들은 하나 둘 파견직 노동자들로 대체될 것이다. 대기업 사무직보다는 적지만 생활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던 대기업 생산직 일자리들은 앞으로는 더 힘든 일을 하면서 월급은 절반도 받지 못하는 일자리로 대체될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각자의 정책에 대한 다양한 논거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보수의 경제 해법으로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면 심화됐지 해소되진 않을 거라는 점이다. 보수가 제시하는 논리는 이렇다. "부자들이 잘 살면 가난한 사람들도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딱히 근거는 없지만 말이야."

 독자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정말 그렇게 믿고 있으신지? 대기업이 마음껏 불공정 거래를 하고 비자금을 축적하고 환경 규제를 받지 않으면, 부자들이 세금 없이 부동산 투기를 할 수 있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뭔가 떡고물이 떨어질 거라고 믿고 있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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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이야길 하다가 경제 이야길 하는 것은 경제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에도 진보와 보수의 시각이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진보, 보수 모두 민주주의를 지킨다고 주장하지만 둘 중 한쪽은 민주주의의 타락을 불러오고 있다. 진보, 보수 모두 경제 발전을 이야기하지만 둘 중 한 쪽의 주장은 양극화가 심화될 수밖에 없는 방법을 주장하고 있다.

 경제적인 정의를 이루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하다. 실질적으로 일반인들, 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을 펼치는 사람보다는 부자를 위한 정책을 펴는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서민들이 선거에 무관심하거나, 어떤 정책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잘 모르고 있다. 집 한 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종부세 폐지를 주장하는 대통령 후보를 찍는다.

 양극화 현상이 가져온 이런 무관심과 무지함도 양극화 해소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되길 기대해볼 수 있다. 결국 현상을 정리해서 이야기하자면 특권층과 부자들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후보에게 투표를 해왔고 반대로 일반인들, 서민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자화자찬하기에는 아직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공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나마도 죽을 힘을 다해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속도로 후퇴한다는 것을 2008년 한국에서 깨닫고 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붉은 여왕과 함께 미칠 듯이 달리지만 이상하게도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때 붉은 여왕은 깜짝 놀란 앨리스에게 말한다. "여기서는 같은 자리에 계속 있고 싶으면 힘껏 달려야 해.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적어도 그 두배는 빨리 달려야 하지." 그렇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적어도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제자리라도 지키려면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는 것, 그 노력을 게을리할 때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뒤로 처지고 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민주주의의 문제는 너무 시급해져서, 시한폭탄을 장착한 것 같은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조차 사치스러울 지경이다."
<붉은 여왕의 민주주의> 中 발췌, from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