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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본문

서평&예술평

박노자의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thezine 2008. 1. 2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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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는 원래 러시아 사람이다. 모국 러시아에서 한국에 대해, 정확하게는 북한에 대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고, 아예 한국 사람으로 귀화를 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고 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듣기에 지극히 러시아 이름다운(?) 느낌의 이름이다.
 
 이 사람의 이력은 참 재미있다. 러시아에서 한국을 공부하다가 한국에 귀화했다는 사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한국말을 참 잘 한다는 평가(이에 대해 내 의견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를 받는다.

 박노자의 재미있는 이력도 이력이지만 그가 쓰는 책들은 그 이상으로 흥미롭다. 박노자는 책을 많이 썼다. 이 글을 쓰며 그의 책을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책을 썼다. 당연히 책마다 다른 주제를 담고 그 주제에 맞춰 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저작에는 공통된 주제의식이 담겨있다.

 제국주의, 근대(近代)의식, 극우비판, 소수자 인권, 파시즘, 다양한 형태의 폭력... 이런 제목만 봤을 때는 이런 주장이 당연하기만 한, 흔한 주제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박노자가 이런 주제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비판하는 방식은 예상보다 훨씬 가혹하고 통렬하다. 예를 들면 일반인들이 식민 시절 지사(志士)로만 막연히 기억하는 안창호 선생이나 위대한 민족주의 사학자로 알고 있는 신채호 선생의 사상과 행적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을 가한다.

 이 책의 제목 밑에는 '박노자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라고 쓰여있다. 시간적 배경은 대체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중반, 조선말과 일제시대이다.

 이 책은 각각 다른 주제에 대해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고 치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 한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구한말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다. 그 전에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현대에 이르러 과거의 역사를 '민족'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모두 현시점의 정치적 필요 때문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수호자였던 것처럼 묘사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경쟁하는 이웃 국가였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와 맞서 싸운 고구려를 한민족의 수호자로 해석하는 것이나, 당나라와 싸우던 고구려를 후방에서 괴롭혔던 신라가 민족의 역적이라는 식의 해석은 오늘의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국가를 단위로 전쟁과 스포츠경기를 벌이는 오늘날 더욱 더 강화되고 있다.


 민족의 개념에 대한 위의 비판에서 볼 수 있듯, 2008년을 살고 있는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의 대부분은 사실은 그 전부터 쭉 있었던 것이 아니라 20세기 들어 서양과 중국, 일본을 통해 수입된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정통성이 없는 군사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순신장군 등 무인(武人)을 기리는 사업을 과도하게 벌였다고 한다. 당시로선 엄청난 거액을 들여 사당을 짓고 동상을 지었다. 광화문의 이순신장군 동상,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있는 낙성대의 강감찬 장군 동상 같은 것들이 모두 그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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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가 지은 책들. 이 외에도 더 있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좌파 정권'으로 불려질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좌우'에 대한 개념이 상식을 벗어난 경우가 많다. 어느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오른손을 왼손이라 하는 주류 언론의 행태를 여기서 다시 지적하진 않겠다.

 '왼쪽'에 가깝다는 딱지만 붙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한국의 풍토에서, 박노자는 보기 드문 좌파 지식인이다. 그가 러시아 출신이기 때문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인지를 따져서 그 행동을 분석해보려는 못된 습관이 들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우리가 당연스레 여겼던 것들, 나쁘지 않다고 여겼던 것들의 문제점을 낱낱이 까발린다. 독자로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비판이 속 편하지 않다. 더구나 귀화했다고는 하지만 외국 출신인 사람이 한국 사람의, 한국 역사의,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아프게 지적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황색언론의 낚시질이나 편향적인 네티즌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흑색 선전과는 달리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며, 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악의가 담겨있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의 책을 읽을 리가 없지.)

 박노자가 든 비판의 펜끝은 '극우'보다는 온건보수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 균형잡힌 시각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동의하기 힘든 극우적 사상에 대한 비판은 그의 관심사가 아닌 듯 하다. 기본적인 상식을 갖고 있고 나름의 균형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정신세계 한 구석에 비틀어진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 박노자의 목표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세계관에 어떤 오류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예를 들면 아직도 황우석 박사를 믿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나, 혹은 주류언론의 선동을 어느새 자신의 생각이라 착각하고 내면화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덮어버릴 것이다.

 '나는 나름 책도 틈틈히 읽고, 균형잡힌 생각을 하려 노력하는 온건 보수/온건 진보인데, 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비판을 읽어야 하는가?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극우가 있지 않은가?' 이런 불평을 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비평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바로 비판적 지식인의 시금석이 아닐까.


 박노자의 책은 위의 리스트에서 나온 것처럼 생각보다 꽤 많은데 어쩌면 그 독자층은 꽤 한정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가 펼치는 비판들을 비록 소수의 독자들만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넓게 퍼져나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다.

 황우석의 사기행각을 폭로했던 PD수첩에 대해 다수 네티즌이 폭도로 변해 MBC 시청 거부 운동까지 벌였었다. 하지만 사기 사건의 실체가 밝혀진 후에는 상당수 네티즌이 잘못 생각했다는 점을 인정했던 걸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래도 명백한 사실 앞에서는 자신이 틀렸을 때 틀렸음을 인정할 줄 아는 것 같다. (물론 아직도 간간이 황우석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보이긴 하지만.)



 한 가지 박노자에게 바라는 건, 그의 문체를 고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박노자는 한문으로 된 고서적, 역사책을 자주 인용하고 외국의 원어 논문/저작도 종종 인용한다. 박노자가 그런 책들로 공부해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잘 모르는 러시아의 어순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그의 문체는 대체로 전형적인 번역체다.

 "보수화된 제국 일본에 큰 유행을 이룬 19세기 유럽의 보수적 법철학을 조선에 - 훨씬 더 집단주의적 형태로 - 유입시킴으로써 조선 계몽주의가 국가주의로 편향될 수 있는 외부적 조건을 만들어준 장본인은 청나라의 량치차오였다."

 여러 수식어를 써서 주어가 엄청나게 길어지고 말투는 극도로 문어체적이다. 책을 읽다보면 문단 전체가 한 문장인 경우도 흔하다. 내용이 비판적이지 않았더라도, 그의 문체 때문에 책을 읽기가 참 피곤하다. 벌써 박노자의 책을 서너권째 읽었지만 이 문체는 여전하다. 아무도 문체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한국어를 그렇게 '잘 한다'고 하는 박노자 역시 외국인으로서 한계가 있는 것일까?

 영어로 된 글을 자주 읽다보면 영어식 표현이 익숙해진다. 반대로 중국어를 자주 쓰는 환경에 있을 때는 중국어식 표현이 입에 붙게 된다. 어순도 어순이지만, 영어 등 외국어에 등장하는 관용적인 표현들이 그대로 수입되어 한글로 된 저작에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다. 나도 글을 쓸 때는 가급적이면 외국어에서 얼치기로 수입된 표현은 쓰지 않으려고 하지만 쉽지는 않다. 하지만 외국어의 어순과 표현을 피하면 피할수록 읽기에 편하다.

 박노자와 대화를 할 기회가 생긴다면 전통적인 한국어의 어순과 표현을 갈고 닦으라고 권고하고 싶다. 더불어 책에서 발견한 사소한 오타도 알려주고 그가 이런 길을 걷게 된 계기도 묻고 싶다. 그가 쓰는 글이 더 읽기 편해지면 좋겠다. 어차피 읽을 책들, 좀 편하게 읽으면 좋은거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