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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 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 본문

서평&예술평

대만 - 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

thezine 2007. 9. 1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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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에 대만으로 여행을 간다. 가깝고, 우리나라와 비슷한 면도 많고, 우리나라 최대의 교역국인 중국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모르는 그 곳에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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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을 여행하기 전에 대만 역사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찾아봤다. (요즘 역사책을 하나 둘 찾아 읽어보니, 나는 우리나라 역사도 듬성듬성 알고 있지만 외국 역사는 정말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물어볼 곳도 없고 인터넷에 몇 안되는 대만 관련 서적 중에 찾아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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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의 서론에 대한 소개

 저자의 변에 의하면, 그림이 많이 들어간 쉽게 읽을 수 있는 교재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책을 썼다고 한다. 생각보다 인기가 많아서 학교 보충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역사 연구를 억압했다고 한다. 1987년에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야 비로소 역사 연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고 한다. (계엄을 40년 가까이 실시했다고 한다. 너무 심했네.)

 대만의 이전 역사는 한인(漢人;중국 본토 출신자) 위주로 역사를 묘사했는데, 이 책에서는 토착민족에 대해서도 서술을 하려고 했다고 한다.

 한국어판 출판을 할 무렵인 2002년 6월에 저자가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마침 연대 국학연구원에서 강연을 했다고 한다. 나도 학교에 다닐 때니까 지나가다 우연히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재미없어보이는 강연 안내 현수막 정도는 봤을지도 모르지.)


 저자가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는 한국 사람을 보면서, 또 대만에 돌아가서 4강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인들의 열정, 인내력이 대단해 보였다고 한다. 또 이런 부분을 대만인이 배워야 할 것이라는 말도 한다.

 역사를 다루는 책들은 대개, 소개할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중요한 내용만 골라서 서술하기만도 바쁘다. 물론 그 취사선택 과정 자체가 저자의 주관과 판단에 의한 것들이지만 그 외에도 저자가 직접적으로 의견을 드러내보이는 경우가 가끔 있다.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 끝의 '..한국인의 인내력을 대만인이 배워야..' 라는 문장.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국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뜻으로 봐도 될 것 같다.

 휴... 이제 시작인데 벌써 길이가 심상치 않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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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 소개를 읽기 전에 알아둘 만한 배경 지식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대만이 원래부터 중국 영토였다고 생각했다. 국공내전으로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대만으로 밀려나기 전까지는 원래 오래도록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이다. 실제로 대만 사람들 역시 ‘역사 수업’에서 중국의 역사를 배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만 한인 커뮤니티에 역사에 대한 글을 썼더니 근대 이전까지는 중국 역사와 구분하지 않는다고 하는 리플이 달렸다.)

 이 책을 읽고 깨달은 점이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읽는데 배경지식으로 알아둬야 할 것이2가지 있다.

 첫번째는, 대만이 중국 본토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은 명나라가 망할 무렵부터 청나라가 망할 무렵까지만 이라는 사실이다. 대만의 역사를 추정할 때 약 5만년 전까지 인류의 거주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만이 중국의 일부였던 시기는 상대적으로 그리 길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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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두번째는, 대만은 ‘중국인(=한족)’만 사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만섬은 원래 폴리네시아 계열이라고 하는, 동남아시아나 남태평양의 섬을 떠올릴 법한 원주민들이 살던 곳이었다. 이후 중국에서 한족들이 꾸준히 이민을 해오면서 현재는 한족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3. 과거에 대만 역사를 구분하던 방식

 중국 본토(‘대륙’이라고들 표현하는)를 기준으로 대만의 역사를 나눌 때는 크게 3가지 시기로 나누었다고 한다.

I. 과거의 역사 구분 – 첫번째 ‘하란시대’
 1500년대에 네델란드가 대만 섬의 일부(현재 ‘타이난’)를 점령하고 아시아 무역의 기착기지로 사용하며 머물렀던 ‘하란시대’다. (‘하란’은 중국어로 네델란드, 즉 Holland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때 네델란드의 군대와 함께 선교사가 대만에 들어왔다. 이때 한 선교사가 글자가 없었던 대만의 주민들에게 라틴글자를 이용한 문자를 만들어주었다. 이 글자는 그 후로도 150년 이상 쓰였는데, 당시 원 거주민들이 쓰던 언어를 알파벳으로 발음을 표현한 언어이다. 당시 성경도 이 문자를 이용해서 번역되기도 했었다.
 
 역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문자가 생겨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크게 나뉘므로 과거의 그 기준은 ‘하란시대’로 시작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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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人들이 만들었던 성벽




II. 과거의 역사 구분 – 두번째 ‘명정시대’

 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만주족의 기세에 밀려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반청복명(청나라에 반대, 명나라의 복귀, 부흥’)을 기치로 내건 세력이 대만섬에 등장했다. ‘정성공’이라고 하는 명나라의 장수가 1662년, 다수의 군대를 이끌고 대만에 진출해서 그 전까지 대만의 남부지역을 지배하던 네델란드 세력을 몰아냈다.

 지난 초여름에 중국 시아먼에 갔을 때, 여기에서 등장한 ‘정성공’이라는 사람의 기념관에 간 적이 있다. 중국 시아먼이 대만 해협을 두고 마주보고 있는 중국 도시이기 때문인데, 네델란드 세력을 물리치고 대만을 차지한 ‘정성공’은 중국 입장에서는 ‘영토를 수복한’ 영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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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맞은편 중국의 '시아먼'에 있는 '정성공 기념관' 내부 모습. 정성공이 네델란드人들을 무찌르는 모습과 대만에 입성하는 모습이다.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걸고 대만섬을 통치한 정씨 일가는 나중에 결국 20년 만에 청나라에 의해 대만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그동안 본토에서 한족들이 넘어와서 한족 인구가 원주민 인구를 초과하게 된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거리상으로 가까운 복건, 광동성 출신들이었다.



III. 과거의 역사 구분 – 마지막으로 청조대만통치 시대

 청나라는 대만 섬에 살던 토착민족의 토지소유권을 승인하였을 뿐 아니라 한인이 원주민 땅에 침범하고 개간하는 것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본토에서 한족들이 밀려들어왔고 청나라가 마련한 제도로는 원주민의 거주지가 침해당하는 추세를 막지 못했다. (먹고 살기가 팍팍해서일까, 그 당시 이미 인구가 많아서일까? 중국 사람들은 자꾸 자꾸 퍼져나가는 게 그 속성인 것 같다. 물이 끓으면 냄비뚜껑이 열리고 물이 넘치듯 인구도 압력처럼 옆으로 밀려 밀려 나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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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족들은 끊임없이 경계선을 침범해서 땅을 개간했고 기존의 토착 민족이 소유했던 땅도 조금씩 차지하기 시작했다. 임대, 토지 소유, 계약과 같은 모든 토지 거래 행위가 본토의 제도를 기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토착 민족들은 끊임없이 내륙 산간 지역으로 밀려나거나 한족에 동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대만섬에는 사슴이 많았는데 수풀을 개간하면서 사슴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수렵 생활을 하던 토착 민족도 점차 생활의 기반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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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청조 통치를 받은지 200여년이 흘렀다. 그리고 대만과는 전혀 무관하게 먼 곳에서 일어난 1894년의 갑오년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했다. 그리고 중국은 중일 시모노세키 강화회담(여기에서 익숙한 이름 ‘이홍장’이 등장한다. 이홍장은 시모노세키에서 일본의 실세였던 이토 히로부미와 강화조약을 맺었다.)에서 대만을 일본에 할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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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이 하란시대, 명정시대, 청나라시대로 대만의 역사를 구분하는 것이 이전의 방법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그 전의 역사를 포함한 ‘대만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대만 400년사’라는 표현은 정성공이 대만을 통치하기 시작한 1600년대를 기점으로 삼은, 한족의 관점에서 바라본 대만의 역사이다.

 일반적으로 역사를 다룰 때 선사시대를 한 단락으로 서술하고 그 이후 역사 시대에 대해 문물의 특징이나 왕조를 기준으로 역사를 나누듯이, 이 책에서는 대만도 일반적인 국가의 역사를 서술하는 기준으로 이 책을 쓴 것이다.





4. 저자가 바라본 대만의 역사

I. 저자가 본 대만의 역사 – 선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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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랑도 연결되어있었나보다. 거리상으로 일본의 오키나와에도 가깝다. 실제로 역사 기록에서 가끔 류츄(流球)라는 표현이 지금의 오키나와가 아닌 대만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대만은 약 5만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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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는 아래쪽일수록 먼 과거를 뜻한다. 5만년 전에는 크게 2개의 문화가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고 나중에 5~7천년 전에는 크게 대분갱 문화로 통합된 문화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그 후에는 다시 여러 가지 문화로 나뉘는 특징을 보이는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의미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유적지로는 원산유적지와 십삼행 유적지가 있다고 한다.

 원산유적지라는 곳은 이곳에 선사시대 유적이 묻혀있음이 알려진 이후에 사찰이 들어섰고 이 사찰이 확장을 할 때마다 훼손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보다 못한 일본인 교수가 자비로 일대 토지를 구매하고 정자를 세운 후 대만총독부에 기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시대 이후 개발로 인해 이 유적지는 모두 사라졌다.

 또 하나의 유적지인 십삼행 유적지는 금속기시대의 유적지인데, 이곳은 현재 폐수처리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역사 유적의 최대의 적은 건설공사라고 필자는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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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다 보니 흔들렸네. 아무튼 요점은... 선사 유적지가 이모냥이 됐다는 거... 어이 없네.


 대만 토착민의 언어를 연구해보면 이들의 언어는 ‘남도어족’에 속한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여러 지역에 분포된 어족이다. 물론 이들 언어들이 지금 서로 소통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언어 연구는 정말 어려울 것 같다. 지금 남아있는 언어의 흔적과 희소한 참고 문헌을 바탕으로 어족을 구분하고 뿌리를 유추하는 작업은 뜬구름 잡는 작업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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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보자면, 저 넓은 지역이 모두 '남도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일본의 오키나와가 일본 본토와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를 갖고 살아왔던 것처럼 대만섬도 중국 본토와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II. 저자가 본 대만의 역사 - 대만의 발견(?)

 수풀이 울창하게 우거진 대만 섬을 지나가던 포르투갈의 배가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으로 Ilha Formasa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해서 Formosa가 대만의 애칭으로 쓰인다고 한다. (남이 어떻게 불러줬느냐 하는 표현에 매달리는 다른 예들이 생각난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중국의 수저우에 대한 ‘동양의 베니스’, 베트남에 하
롱베이에 대한 ‘유네스코 지정 자연유산’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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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네델란드인들이 정착하면서 일부 해당 지역을 Tayouan(대원;大圓)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의 Taiwan(대만)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곳은 섬이기 때문에 왜구도 창궐했고, 밀무역이 성행했으며 연해의 주요 교통노선이었다고 한다. 네델란드에게는 이곳이 중국과 무역하기 위한 근거지이자 중간 기착 항구였다. 네델란드 사람들은 이곳에 일본인과 한족의 이주를 장려하여 쌀과 사탕수수를 재배하도록 했다고 한다. (사탕수수는 이후 일제시대에도 대만의 주요 농산물로 자리잡게 된다.)



III. 저자가 본 대만의 역사 – 하란시대/명정시대/청통치 이후…

 네델란드인들이 대만에 들어온 후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기까지는 이미 위에서 설명했다. 대만이 일본에 할양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만 사람들은 이에 격렬히 저항했다. 언제 했는지도 잘 몰랐을 중일전쟁의 결과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다른 나라에 넘어간다니, 이들의 황당함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IV. 저자가 본 대만의 역사 – 일제시대 초기

 대만이 일제에 할양되기로 결정된 일본의 군대가 대만에 들어왔다. 일본 군대가 오기 전, 내부적으로 반대가 격렬했지만, 대만도 우리나라처럼 친일파들이 있었다. 일본명치국왕을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자발적으로 나는가 하면 ‘고현영’이라는 사람은 일본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앞잡이를 자청하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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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이완용에 비유할 수 있는 사람



 일본군은 타이베이에 평화롭게 입성했지만 남부지방까지 이동하는 동안 격렬한 저항에 접했다. 현대적인 무기와 체제를 갖춘 일본군이 타이난까지 이동하는데 4개월이 걸릴 만큼 저항이 격렬했다고 한다. 하지만 농사기구 같은 소박한 무기로 저항했던 만큼 대만인들의 피해도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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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일본군의 대만 입성 과정을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성문을 열고 적을 맞이한 자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심지어 부러워한다면 그런 민족에는 미래가 없다. 당시 일제의 앞잡이를 자처했던 고현영의 후예는 아직도 부유하게 생활을 하고 있다. 어떤 친일파는 희생을 막기 위해 협력했다고 변명하지만 그들은 새 정권의 선물과 사례를 받아들이고, 밀접하게 협력까지 했다. 옛 말에, 마땅히 머리를 숙이고 걸어야 할 놈이 고개를 쳐들고 활보할 때 나라가 망하는 것이라 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와 대만의 공통점이 가장 두드러졌던 부분이다.




V. 저자가 본 대만의 역사 – 일제시대의 항일 운동


 대만에서는 일부 반일 운동이 존재했다. 유명한 반일 인사들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여청방: 신통한 힘을 가진 황제로 알려짐
나준: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
강정: 산에서 자기만의 왕국 건설

 여청방과 나준은 의기투합해서 반일 역모를 계획했는데, 여청방은 ‘세 치만 뽑아도 적 3만을 쓰러트릴 수 있는 보검을 가졌다’고 나준에게 이야기했었다. 이들의 항일 봉기가 알려져 실패한 후 일본군은 수천명의 장정을 살해하는 ‘초파년참안’이라는 사건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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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유명한 반일 운동으로 ‘무사 사건’이 있다.

 당시 대만에서는 많은 토착 주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과중한 노역에 시달리기도 했고 동화 정책에 의해 강제로 일본 남자와 결혼한 원주민 부녀가 나중에 버려지는 일이 빈발했다. 이에 반발한 토착 주민이 일본인 행사를 습격해 일본인들을 몰살시켰고 이에 대한 결과로 이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몰살당했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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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사건을 일으켰던 부족의 추장 '막나 로도'. 그의 여동생이 일본인에 강제로 시집간 후 버려진 것에 격분한 것이 결국 사건을 초래했다고 한다.



 여청방과 나준의 이야기는 너무 허무맹랑해서 실소가 나올 정도지만 이 결과로 여러 사람이 살해당한 것을 생각하면 한 편으론 참 안타깝다.

 비록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 처지가 됐지만 하나의 독립된 국가였던 조선은 비교적 체계적이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독립 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만은 청나라의 일개 변방이었으며 지도자층 다수가 도망쳐버렸기 때문에 조직적인 반일 운동이 어려웠던 것 같다. – 는 나의 추측이다.




VI. 저자가 본 대만의 역사 – 일제시대의 대만 사회 변화와 해방


 선진국가는 식민지에 모국의 근대제도와 시설을 일부 도입하게 된다.


-교육: 일본은 대만에서 초등 교육을 강조했다. 일제 말기에는 상당수 대만인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중등 이상의 교육은 교묘히 제한을 두었다. 적당히 부려먹기 편한 정도로만 교육하는 것이 제국 식민 통치의 공통점인 것 같다. 대만의 어린 학생들은 근대적인 제도와 문물을 배울 수 있었지만 자신의 역사를 배울 수도 없었고 자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주체성을 박탈당한 식민자 의식을 가진 채로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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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대만의 국가권력(총독부)은 대만의 자본주의 발전을 고도로 보호했다. 형식적으로는일반적인 초기 자본주의의 모습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식민지에서 통치자는 곧 자본가와 같은 민족이기 마련이다. 일본인 기업가들은 대만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들의 생산물을 비정상적으로 싼 가격에 강제로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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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거리가 20년 만에 달라진 모습이다. 1919라는 숫자가 친숙해서 더 눈에 들어온다.



-전쟁: 일본은 전황이 치열해지면서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황민화 정책'을 펴서 일본어 교육, 창씨개명과 같은 사업을 벌였다. 조선 민초들이 학도병으로 강제징집되고 노동자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과 같이 대만인들도 노동자로, 통역으로, 군인으로 전쟁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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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글자를 만들기 위해 천 번 수를 놓아야 했는데 한 사람이 한 번씩만 수를 놓을 수 있었다고 해서 '천인침'이라고 부른다. 전쟁에 불려나간 사람의 무사를 위해 부인이나 여자 가족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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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연극에 동원된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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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제국에 불려나가 유골이 되어 돌아온 대만인의 행렬.



-해방: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고 일본은 패전했다. 일본의 패전, 그에 따른 해방. 일본 제국의 식민지 국민으로 전쟁에 자의와 타의로 참전했던 대만인들에게 종전은 무엇이었을까? 대만인들은 이 결과에 대해 패배도 승리도 아닌 애매모호한 감정을 가지게 됐다. 더군다나 원래 중국도 아닌 대만의 ‘원주민’들에게는 더더욱 해방이란 그 무엇으로부터의 해방도 아닌 애매모호함 그 자체였다.



5. 책이 끝난 후의 이야기

 책은 이렇게 일본으로부터의 해방하는 데서 끝을 맺고 있다.

 "기나긴 전쟁은 드디어 끝이 났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꿈 속에서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국면이었다."

 저자의 맺음말은 그 이후로도 대만의 역사는 평탄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풍긴다. 과연 해방 후 대만의 근대사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었을까? 대만인들은 그들 자신의 근대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어쩌면 아직도 대만인들은 스스로의 근대사에 대해 평가하고 무난하게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결론에 이르지 못했나보다.

 예를 들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4.19나 5.18, 5.16, 12.12와 같은 사건들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 자리를 잡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되지도 않고 있다. (써놓고 보니, 외국도 이렇게 월.일.로 사건을 표기하곤 할까 궁금해진다.)

 과연 대만 사람들은 스스로의 근대사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민주화 운동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을까? 대학생들의 시위는?

 아쉽게도 책은 여기에서 끝났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대만에 대한 책이 많지 않아서 또 어떤 책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만여행에 앞서 기본적인 역사는 알고 가자는 생각에 고른 책 때문에 궁금증만 더 많아졌다. 아마 대만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도 이런 깊은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겠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어봐야지! (베트남에서 만난 유럽, 호주 친구들은 인간적으론 다들 좋지만 동양의 역사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대체로 무식했던 기억이 있어서...-_-;)

아~ 이렇게 공 들여서 글 쓴 것도 오랜만이네. 과연 누가 끝까지 읽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