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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기운이 기승을 부리는 시국 - 국방부 불온 서적 선정에 부쳐

thezine 2008. 8. 4.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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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에서 '불온 서적'을 반입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뉴스에 이어, 리스트에 포함된 책들이 대부분 교양 도서로 여러 차례 추천을 받은 책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었다. 그에 이어 이번에는 '불온 서적'으로 '선정'된 책들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는 소식이다.

 위에 소개한 뉴스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국방부 선정 불온 서적 특별전을 열었다. 아래와 같이 불온 서적에 선정된 영광스런 서적들을 한 데 모아서 판매하고 있다. 마케팅 측면에서 발이 빠른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당위성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없었다면 기업으로서는 쉽게 할 수 없었을 행동이다.

 어쩌면 이번에 국방부에서 선정한 23권의 책이 청소년, 청년 교양 필독서로 자리매김하는 건 아닐까 하는, 진정한 블랙코미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 나도 사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들 정도는 읽어봐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 인터넷 서점으로 알라딘을 애용하진 않지만 아래 사진을 갖다 쓴 만큼 아래 서적들이 궁금하신 분은 알라딘 으로 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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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불온서적' 기획전


  군인들 전체를 비하할 의도는 없지만 군대란 곳에서는 가끔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군대가 아니어도 고만고만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다보면 '몰지각'이나 '무개념'도 자가발전하며 그 깊이(?)를 더해가는 현상이 발생한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없는 사람들도 집단 논리에 매몰되어 소속 집단의 이해를 위해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번 '불온 서적' 리스트를 주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악수를 두기까지는 그런 수준까지 떨어질 만한 과정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기업의 반 자본주의적인 범죄행위를 옹호하는 것이 친 자본주의적인 것이라고, 미국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면 '반미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정리해놓고 보면 말이 안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에 국방부의 삽질에 대한 비판을 일일이 늘어놓으면 끝도 없고, 다만 '불온서적'으로 선정된 책들의 특징이 하나 눈에 띈다. 위의 책들은 하나같이 한국의 자칭 보수들이 싫어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자칭 보수들은 시위대가 도로에 서있는 건 몽둥이로 때려잡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대기업 총수의 탈세와 배임은 처벌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모순된 주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법치주의를 이야기하는 재미있는 족속들이다. 100분토론에서 보수쪽 패널을 섭외하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자칭 보수주의자들로서도 그런 논리적 부정합성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토론은 말장난'이고 '윤리는 함정'이라는 궤변 뒤에 숨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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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읽는 책 중에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라는 책이 있다. 요즘 독서가들의 지적 유행이 된 듯한 '동아시아'를 다룬, 창비에서 기획 출판한 시리즈물 중에 한 권이다. 옛날부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룬 책에는 유난히 약했는데 이 책은 저자의 학문적 배경이나 관심사 자체가 상당히 철학적이고 어렵다. 그래서 분량에 비해 진도가 너무 느리게 나가고 있다.

 어렵고 생소한 개념들이나,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학자들을 인용한 그 책을 읽다가 문득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 생각이 났다. 일제 시대에 헌병이었다는, 그러나 연로하셔서 그다지 존재감은 없었던 분. 'but'를 항상 '벗뜨~'라고 발음하던 분. 수업 외엔 거의 말을 안하시던 분이 뜬금없이 '철학책 같은 건 보면 안돼. 그런 거 읽다 빨갱이 된다'고 한 적이 있다.

 그 고등학교는 선생님들간의 서열이 정해져있었고 누가 몇 위다라고 학생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서열이 공공연했다. 그래서 젊고 능력은 있지만 연줄이 없는 선생님들은 참지 못하고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말하자면 도심 속에 자리한, 전형적이고 구태의연한 기득권의 小왕국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며칠이 지나 윤리 수업 시간에 윤리 선생님이 철학책을 몇 권 추천하자 학생 중에 누군가가 '영어쌤이 철학책 보면 빨갱이 된다던데요' 하고 대꾸를 했다. 윤리 선생님은 서열이 한참 높은 영어 선생님의 언급과 자신이 이야기한 '철학책'은 종류가 다르다고 조심스럽게 설명을 했던 것도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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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이런 느낌?



 어려운 책을 붙잡고 있자니 고등학교 시절 '영어쌤'의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철학책 보면 빨갱이 된다'던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아마도 국방부에서 선정한 '불온 서적'이 그 '영어쌤'이 말한 '철학책'들일 거라 생각한다. 그 분이 말한 '철학책'은 학문적인 철학을 다룬 책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쓴 책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불온 서적'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 '불온하다'가 무슨 뜻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말로 '불온'은 주로 명사 앞에 쓰여서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영어로 번역하면 1:1로 꼭 맞는 표현은 없고 몇 가지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다. 인터넷 영어사전으로 찾아보니 seditious(선동적인), subversive(전복적인), dangerous(위험한), disturbing(교란시키는), dissident(반체제의), threatening(위협적인) 같은 표현들이 쓰였다.

 국방부가 선정한(정확히 말하면 국방부의 진정한 수구가 선정한) 책들은 사실은 위에서 설명한 '불온'의 정의와는 거리가 있는 책들이다. 기업의 범죄행위 비판 서적은 자본주의 원칙이 올바로 실현되도록 하자는 주장이고, 북한에 대한 책들은 적이든 친구든 상대방을 이해해야 하고 싫든 좋든 우리나라는 북한을 알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나쁜 사마리아...'같은 경제학 서적은 경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경제의 이면과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지식을 제공해준다.

 하나같이 현 체제를 발전시켜나가고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는 책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역사책에서 왕의 실정을 두둔하고 왕의 눈과 귀를 막은 간신배들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잘도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주장들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그것이 애국이라고 착각한다.

 말하자면 국방부 선정 도서들은 입에 쓴 약이요 충신의 고언이라고 할 만한 책들이다. 충치가 생겼을 때 초반에 간단히 치료를 할 것인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결국 수백만원을 들여 임플란트를 박아 넣어야 할 때까지 썩은 부위를 무시할 것인지, 그런 고민이 필요한 사람이 많다. 어찌보면 복잡하고 거대한 담론이지만 어찌보면 간단한 논리인데, 진보주의자들의 노력이든 능력이든 아직은 많이 부족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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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의 불온 서적 선정은 이미 헛웃음이 나오는 희극으로 끝나가고 있다. 여기에 어떤 패러디가 연이어 등장할지 은근히 기대도 된다. 하지만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던 중세 유럽의 왕권신수설이 한국에서 다시금 '대권신수설'로 부활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이다. 한쪽에선 상식과 상상의 경계를 과감히 뛰어넘는 '불온 서적' 에피소드에 웃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국방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이 현실이다.

 국방부 에피소드가 마냥 웃을 일은 아닌 것이, 앞으로도 이런 상식과 지식을 뛰어넘는 주장들이 연이어 등장할 것이고 그 중 상당수는 웃음거리로 끝나지 않고 정부 정책을 통해 우리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한 물이 갔지만 한 때 사랑받던 유행어가 떠오르는 밤이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