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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쁜 사마리아인들

thezine 2008. 10. 6. 00:10
'나쁜 사마리아인들' 영문판 표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영문판 표지


 장하준은 캠브리지('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이라고 자동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인터넷을 너무 많이 했나보다)의 경제학과 교수이자, 인기있는 경제학 서적들을 다수 집필한 사람이다. 이전에도 이 사람이 쓴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번 책은 보다 특별한 계기로 읽게 됐다. 다름 아닌 국방부에서 선정한 '불온 서적'리스트에 당당히 대표적인 도서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

 국방부에서 '불온 서적'의 리스트를 만들어서 부대 내 반입을 금지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8월 4일, 불온한 기운이 기승을 부리는 시국 - 국방부 불온 서적 선정에 부쳐) 장하준 교수는 이전부터 정부의 적극적 개입과 재벌체재, 독재정권을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쓴 책에 대해 '반정부, 반미' 도서라는 딱지를 붙인 건, 대단한 무식함이라고밖에는 해줄 말이 없다. 우리나라 국방부를 소재로 덤앤더머 스타일의 무식하고 저질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그 영화의 ending credit에 제일 먼저 이 리스트를 만든 사람의 이름을 올려야 할 것이다.

 장하준, 그는 진정 엄친아

 이 책을 읽으면서 보니 이 사람이 쓴 책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전에 '쾌도난마...'를 읽을 때 인지하지 못했던 저자의 약력을 새삼 보게 됐다. 장하준 교수 본인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남들이 미국으로 유학갈 때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박사를 마치기도 전에 교수직을 제의 받았다고 한다. 동생, 사촌들이 고려대, 런던대, 뉴욕대 교수에 아버지는 하버드에 유학한 공무원으로 우리나라 조세 분야 최고 전문가에 전직 국회의원. 자세한 스토리는 http://ezhistory.org/zbxe/1250 이곳 자료를 참조하시라. 어쨌거나 요점은 진정한 '엄친아'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유명한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그의 사촌 형제)

 위의 링크에 소개된 장하준 교수의 집안 내력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놀랍고 그야말로 '비범한 집안 출신의 비범한 학자'구나 싶은데, 그에 비하면 덜 인상적일지 모르지만, 장하준 교수의 저서들은 대개(어쩌면 모두) 영어로 집필된 후 한글로 번역되어 들어와있다. 한국인이 집필한 책에 노엄 촘스키 같은 국제적 지성인의 서평이 실린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 사람들의 숫자는 다른 지표들에 비해 적은 것이 사실이다. 언어 문제 때문인지, 이공계에나 예체능계에서는 해외에서 활약하는 사람이 꽤 많지만 문과, 사회과학 계통에는 한국인이 많지 않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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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주제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발전 과정에서는 보호무역, 유치산업보호, 지적재산권 불인정 등 수단을 이용해서 발전해놓고 이제와서 후진국들에게는 자유무역을 강요하고 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인위적인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당장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며 거짓 친절을 베푸는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같다는 내용이다.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 외에도 유럽의 선진국과 함께 미국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내용이 담겨있는데, 아마도 이런 부분들이 국방부 관계자에겐 못내 괘씸했나보다. '감히 미국을 비판하다니? 이놈은 반미주의자임이 분명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끔 점심시간에 남는 시간에 서점에서 선 채로 책을 읽곤 하는데 이 책은 그런 식으로 몇 페이지 넘겨보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사서 봤다. 영어로 쓰여진 책을 번역한 거라 문체나 표현방식도 번역서나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한글로 쓰여진 책들에 비해 이해하기가 어렵다. 번역자가 반쯤 포기한 채로 적당히 번역했거나 단어를 잘못 선택한 듯한 부분도 가끔 눈에 띈다. (즉 서서 읽자니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던 것도 사볼 수밖에 없던 이유중에 하나다. 서점에 가면 서서 대충 넘기며 읽는 것 이상의 가치가 없는 책도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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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가급적 한국의 경제적 경험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려고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국제 무역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저자의 중요한 참고사항으로서 한국의 70, 80년대 고도 성장기를 소개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외국 생활을 하고 외국 대학의 교수로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이 한국 근현대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지 읽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곁다리 재미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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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하준 교수가 진보에게 던져주는 고민들

 장하준 교수를 비판하는 진보 진영에게 있어서 독재 정권 시절의 고도 성장은 다루기 곤란한 주제 중에 하나다. 단순히 '그 시절엔 누가 대통령을 했어도 그 정도 발전할 수 있었다'는 식의 설명은 썩 맘에 드는 대답이 아니다. 독재정부가 경제 발전에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장하준의 논리가 독재를 옹호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비교적 중립적으로 보이는데, 장하준 교수의 다른 저서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독재 정권의 효율성을 칭찬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독재 정권과 재벌체재를 옹호하는 것과는 무관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제발전 패러다임에 대한 책이다. 성인이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와 같은 경기장에 올라가서 "우리 공정하고 자유롭게 경쟁하자"고 강요하는 것이 기존의 신자유주의다. 이것이 불공정하게 보이는 만큼이나 선진국들(특히 미국)의 자유무역 강요는 불공정한 것이다.(번역서를 읽다보니 서평도 번역체가 튀어나온다.) 심지어 식민지 시절만큼이나 심하게 후진국의 조세 주권을 침해하려는 주장들이 득세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신용 위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이 말빨이 서지 않는 상황이 왔으니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다.)

 책의 주제를 다시 압축하자면, 가난한 나라들이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하준 교수는 좌파로 분류할 수 없는 학자이지만 이 책의 주제는 좌파주의 경제학자들의 목적의식과도 상통한다. (물론 국방부에서 이런 것까지 이해하고 금서로 지정했을 리는 없지만.)

 장하준 교수가 그동안 옹호하고 칭찬해왔던 한국의 경제 발전 방식에 대한 한국 진보의 비판, 그리고 한편으로 선진국의 대외 경제 정책에 대한 그의 비판을 보면서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단순히 진보와 보수, 우파와 좌파의 이데올로기적인 피아가 명확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20년 전의 두뇌로 세상을 거꾸로 가게 하는 세상이 왔지만 진보주의자들마저 20년 전의 전장(戰場)으로 돌아가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