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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예술평

[서평]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thezine 2008. 7. 5.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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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중국어를 시작할 때 일본어도 언젠가 배우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앞으로는 동북아시아의 시대라고 나름 생각을 했었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일본어를 시작도 하지 못했다. 우선 재밌겠다 싶은 책만 가끔 읽어보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은 1800년대 말부터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1945년 조선의 해방을 맞이해서 대거 조선을 떠나기까지 약 60년 정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물론 그 전에도 부산 등지에는 일본인들의 왕래가 있었지만 1800년대 말 이전와 1800년대 말 이후는 왕래의 성격이 다르다.

 이 책 제목의 일본어 발음은 SHOKUMINCHI CHOUSEN NO NIHONJIN이다. TAKASAKI SOJI라는 학자가 집필했고 이 사람은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일본내 한국인 문제, 식민지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저술을 해온 사람이라고 한다. 번역자는 이규수라는 사람이고 성대 동아시아 학술원의 연구교수라고 한다.(요즘 읽는 책에서 가끔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 동아시아라는 주제가 각광받는 시기인 걸까.) 마침 얼마 전에 새로 산 책 중에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라는, 역시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 일본인의 저작 역시 이규수가 번역했다.(이런 재밌는 우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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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한 건 1876년 2월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병자수호조약) 이후라고 한다. 이 조규에서 부산을 개항하고 2개 항구를 추가로 개항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인천과 군산을 개항하게 된다. 부산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과 관련된 일이 많았다. 역사적으로도 왜관이라는 지역이 설치되어 일본인들이 머물고 왕래를 했었고 가장 먼저 일본에 개항한 곳이 부산이다. 일본에서 가장 가깝기도 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쓰시마(대마도)와 무역을 했었다고 한다.

인구 통계학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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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내의 일본인 인구 변화

 일본인 인구는 처음에는 아주 완만하게 증가하고 가끔 감소하기도 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임오군란, 일본의 지지를 받아 일어났다가 실패한 갑신정변 이후에 일부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갔었다.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 러일 전쟁 무렵부터 일본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무렵인 1942년에 최고 7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는 약 2000만이었던 것 같다.(구글을 좀 찾아보니)

 초기 일본인 거류자들의 대부분은 남자들이었다. 점차 침략 정책이 자리를 잡을수록 여성과 어린이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이 종사했던 직업은 시기별로 구성비율이 달랐지만 뒤로 갈수록 상업과 교통업이 비대해진다. 당시 조선 내 일본인들의 직업을 분석해보면 조선총독부를 정점으로 조선인 위에 군림하는 사회 구조였다. 주로 총독부 관리, 군인, 경찰, 상인 등 비생산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이 다수였다.

 일본인들은 초기에는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 집중되어있었고 식민지 말기에는 함경도 등 북부에도 많이 진출했다. 이는 만주 침략 정책과 군수공업화 정책과 연관이 있다. 일본인들은 주로 치안이 안정된 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면서 조선인과는 직접 대면이 많지 않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생활했다.


지역별 현황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지금 해군기지로 유명한 경남 진해에 처음 군항이 들어선 것은 일제시대였다. 러일 전쟁이 1904년 개전한 후, 거제도를 거점으로 진해만에 포대와 막사를 건설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진해만에 군항을 건설했다. 가까운 통영은 울산의 방어진, 부산과 함께 3대 일본 이주민 어촌이었다. 지금도 통영시 도남동에 가면 일본식 건물들이 즐비하다고 한다.(통영에 갈 기회가 있으면 꼭 들러보고 싶다.) 울산 방어진에는 후쿠오카 현의 수산조합이 이주 어촌을 건설했다.

 일본인들이 워낙 생선을 좋아하다보니 위와 같은 이주 어촌이 생겨나고 울릉도에도 끊임없이 일본인들이 밀려들었다고 하는데, 그 외에 일본인 때문에 생겨난 도시도 있다. 대전은 원래 이름 그대로 밭이 펼쳐진 벌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04년에 대전역이 세워지고 경부선의 중간지점으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조치원과 대전은 순전히 식민지 당국이 개발해서 생겨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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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관광국의 관광엽서

 위에 대전을 언급했는데 일본인들에게는 철도가 아주 중요했다. 우선은 부산과 서울,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부선과 경의선이 가장 시급했다. 당장은 일본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교통에 필요했고 멀게는 만주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서 병참 보급로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대전과 목포를 연결하면서 대전은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위 그림은 총독부의 관광국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에 많이 놀러오도록 장려하기 위해 만든 관광 지도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에 가는 것을 규슈나 홋카이도에 가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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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내 일본인의 전형적인 악행 몇 가지


 조선말, 식민지 시절 일본인이 저지른 악행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가지가지 여러가지를 여러 경로를 통해서 접했겠지만 이 책에 나오는 특징적인 부분만 소개한다. 책 자체 당시 일본인들의 생활상에 대한 것이다 보니 당시 조선 내 일본인들의 직업과 관련된 부분들이 많다.

 일본인들이 정착 초기부터 패전 이후 조선을 떠나기까지 가장 많이 종사했던 일이 고리대금업과 도매업이라고 한다. 조선 내 일본인의 주요 경제 수단이었다. 일본인들의 고리대금업은 심하게는 10일에 1할이라는 이자를 매기기도 했다. (단리이자라고 해도 1년이면 3600%) 이들의 고리대금업의 주요 목적은 높은 이자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릴 때 담보로 제공한 토지를 빼앗는 것이었다.

 고리대금업자들은 조선인이 돈을 갚으러 오면 일부러 집을 비워서 돈을 갚을 수 없도록 만들었고 결국 이자가 늘어나 갚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빚을 잘 갚지 못하면 조선인의 집의 문을 못으로 박아서 드나들지 못하게 했는데 이 방법이 금지되자 나중에는 자기 집에 감옥을 만들어서 빚을 갚지 못한 조선인을 가두고 친구나 친척이 빚을 갚은 후에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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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종군위안부자료집'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 침략 등 일본이 전쟁을 이어나가면서 어린이와 여성들이 '위안부' 등으로 강제로 동원되기도 했다. 이것이 조선인에 의한 자발적인 상업 행위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바로 뉴라이트의 수장 '안병직'이 그렇다. 그는 한나라당의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이기도 하다.) 일본인의 저작에서도 당시 위안부가 취업을 빙자한 사기였거나 강제 납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 속 참고자료)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에 가담한 자들은 수십 명에 달했다. 이들이 일본으로 송환되자 한성의 일본 거류민 대표 유지들이 송별 연회 베풀고 주모자들을 개선장군처럼 받들었다.


 일본인 상인들은 조선인을 멸시하고 신용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도 상인들이 문제가 많다보니 부산의 일본 영사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많은 일본 상인들이 지나인(중국 상인)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뽐내고 건방진 기풍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일본 상인들은 어음도 종종 부도처리가 되어 조선인들의 일본 상인에 대한 신용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토지 측량을 해서 조선의 토지를 조사할 때 측량 기사들은 일본 사람들이었다. 조선인의 땅과 경계를 접한 땅을 가진 일본인들은 측량 기사에게 한턱 낼테니 측량을 유리하게 조작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하도 많아 측량 기사도 기가막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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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의의 일본인

 당시 조선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고 부끄러워했던 사람들은 대개 몇 가지 부류로 나뉜다. 이 책에는 주로 기독교인, 사회사업을 벌인 사람들, 교사, 사회주의자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있다.

 기독교 전도를 위해 조선에 온 목사 덴고 세이, 우에다 요시오는 '나도 일본인이지만 우리 국민이 저지르는 횡포에 비분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가이 요시'라는 사람은 기독교 신자였는데 당시 경성 주둔 일본군 연대에 소속되어있었다. 지시에 따라 마지못해 조선인의 폭동을 진압하러 나갔지만 '천황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 저런 무고한 민족에게 총검을 들이대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했고 결국 영창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특이하게 춤과 무용으로 저항을 표현했는데, 영창 안에서 '조선침략 반대춤', '천황의 명령에 복종할 수 없는 댄스', '식민지주의 절대 반대 무용'과 같은 춤을 췄다고 한다. (참 특이하기도 하지) 자신의 존재를 내걸어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고 3.1운동의 마음을 이해한 일본인은 나가이 요시 단 한 사람뿐이었다고도 평가된다.

 노리타카라는 사람은 일찌기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수집을 했는데 패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갈 때 그동안 수집한 3천여점 미술품을 조선박물관에 기증해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또 다쿠미라는 사람은 조선의 소나무를 연구하고 조선의 식림산업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으며 1931년에 죽어 경성 외곽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혀 조선의 흙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식림산업을 가리켜 일본이 조선을 위해 한 좋은 일이라고 하는 말을 하는 일본인들이 있는데 다쿠미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수탈을 위한 식림산업이었다.


 당시 교사로 조선에 부임했던 일본인들 중에는 편견없이 조선인을 바라보고 진심으로 마음아파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인의 횡포가 눈에 보이고 그 횡포를 참고 지내는 학생들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의 부담이 되어 일본으로 떠났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사였던 시미즈 노리요시는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가르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 표정에 엄청난 반감과 분노를 감지하고, 이런 방식으로 온전한 인격 형성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비판을 했다고 한다.

 여러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오다 나라지'라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재일 조선인 차별에 분개해서 조선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총살당한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조선인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조선 전도에 뜻을 품고 조선에 왔다.

 그러나 광주에서 만난 일본 기독교회의 다나카 기이치 목사에게 왜 조선인에게 전도하지 않는가 질문을 했을 때 생각지 못한 대답을 들었다. 다나카 기이치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일본인은 강도이고 조선인은 피해자다. 자네가 아무리 선의, 혹은 성의로 말한다 해도 자네는 강도의 한 패거리이자 대적의 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그런 자네가 조선인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조선인들이 회개할 사람은 바로 너라고 말하지 않겠나? 원수를 사랑하고 할 수 있겠는가? 가해자가 뻔뻔스럽게 피해자에게 사랑을 설교할 수 있겠는가?"

 조선인을 사랑하는 생활에 일생을 바치고 조선의 흙이 되겠다 결심한 조코 요네타로라는 사람은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공산주의 운동에 관련되서 조선내 일본인의 조선인 민중의 민족해방운동에 조직적으로 참가했다.





 최대 75만에까지 이르렀다는 일본인 중에서 이토록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선을 바라보고 진심으로 이해하려했던 사람들은 비율로 따지면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같은 일본인들에게 '매국노 같은 놈'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고 식민지의 일본인에게 주어지는 혜택받은 생활도 자발적으로 버리고 감옥에 가기도 했다.

 비슷한 상황이 우리나라에 일어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얼마나 약자의 편을 들까 하는 생각을 하면 우울해진다. 애매모호한 '국익'을 위해서라면 도덕 따위는 필요없다는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절대 다수를 이룬다면 당시 일본과 비교해서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도덕성은 좌파의 함정'이라는 궤변이 득세하고 도덕과 윤리를 비웃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다수라면 우리나라는 과연 금수(禽獸)만도 못한 수준은 아닌가. 지금의 우리나라에게 힘이 있고 그럴 의지가 있었다면,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시절과 같은 국제정세 환경이었다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더한 일도 저지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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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 3가지 부류


 일종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당시 조선 내의 일본인들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자신의 행동이 훌륭했다고 정당화하는 부류, 순진하게 식민지 조선 시절을 그리워하는 부류, 그리고 자기비판을 하는 부류이다.

 첫번째 부류에 대해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당시 생활이 궁핍해 쌀은 팔고 잡곡으로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조선인은 원래 잡곡을 좋아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식민지 시절, 한국전쟁 후 한국의 발전 산업에 관여했던 구보타라는 사람은 '나의 유산은 엄연히 조선에 남아있다'는 말을 했다. 특이한 건 이 사람을 인터뷰하고 그의 논리에 대해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도 분명 유아이다. 하지만 그것이 강간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고 비판한 사람이 요즘 종종 뉴스에 등장하는 조갑제라는 사실이다.

 이런 부류가 전개한 논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륙 병참 기지론 전개한 스즈키 다케오라는 사람은 '일본이 조선을 착취, 유린했다는 논고에 항변하여, 조선이 발전한 것은 모두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리는 일본 정부가 한국과 타이완에 대해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의 논거가 되었다.


 첫번째 부류가 '나쁜 놈'이었다면 두번째 부류는 '무신경하고 한심한 놈'의 이미지에 가깝다. 당시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은 조선 내에서 동향회, 동창회를 만들어 기관지와 단행본을 냈는데 그때의 모임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같이 일한 직장 동창회, 학교 동창회 등이 그것이다. 회고담을 통해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도 나이든 일본인들이 어린 시절 다닌 한국의 학교를 찾아가 그리운 마음으로 찾아왔다며 제멋대로 수업 중에 들어가는 등 빈축을 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세번째 부류는 객관적으로 식민 지배를 비판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조선을 그리워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조선에서 태어나 여학교 다녔던 모리자키 가즈에라는 사람은 "총독부 자료를 읽으면서 흐르는 눈물 참을 수 없었다. 우리 생활이 바로 침략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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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끝 부분에서 "최근 교과서 문제에서 '침략'을 '진출'로 바꾸려는 어리석은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다"는 지적을 한다. 80년대부터 시작된 교과서 문제에 대해 중국과 한국이 일본에 강하게 항의하고 외교적인 마찰이 생겼던 것을 가리킨 말이다.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시각을 일본 우익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영한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교과서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에 소개했던 것처럼 한국의 뉴라이트라는 세력들은 위안부가 자발적인 상업행위였다고 주장하거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 덕분에 조선이 발전했다는 이론을 복명복창하고 교과서 개정도 추진하고 있다. '뉴라이트'를 이끌던 신지호 같은 사람을 포함해 뉴라이트 출신의 다수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의 역사 인식의 밑바닥은 어디까지 더 내려가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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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투사 3선 김근태 의원을 물리치고 당선된 뉴라이트 신지호



 저자는 결론에서 "동아시아인 모두 자국의 과거와 현재 역사에 책임감을 가지고 연대하는 아시아 미래를 향해 대안을 마련해가는 세번째 유형으로 거듭나기 위해 역사 연구자들의 연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국수주의적인 생각, 자국중심적인 생각,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시각을 고수한다면 일본,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충돌하는 소모적인 반목을 피하고 공동체적인 미래를 창조해나가긴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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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극우파


 일본의 극우파들의 논리를 일본이 스스로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일본인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보수적인 듯 하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반성'이란 거부감이 생기는 무엇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입장에선 일본인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내부에는 그보다 골치 아픈 문제가 있는 듯 하다.

 일본 극우의 시각을 계승하고 심화시켜나가는 사람들이 뉴라이트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집권당 한나라당과 공조하고 있으니 이건 뭘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뉴라이트가 여러 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현 대통령의 주요 지지세력이 된 상황에서 일본인의 생각이 바뀌길 바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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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