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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way League

thezine 2008. 3. 15. 01:36

 미국 프로야구의 하이라이트는 미국 양대리그의 우승팀이 맞붙는 월드리그 챔피언십이다. 그래봐야 자기들끼리 하는 거면서 '월드'는 왜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름 붙이는 사람 마음이긴 하다. 그런데 예전에 뉴욕 양키스와 뉴욕 메츠가(맞나? MLB를 잘 안 보니) 월드리그에서 맞붙은 적이 있다. 평소에는 다른 주의 다른 도시에서 온 야구팀끼리 경기를 주고 받았지만 그 해에는 두 팀이 모두 뉴욕의 팀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농담삼아 월드 리그가 아니라 'Subway League'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철만 타면 두 팀의 홈경기장을 오갈 수 있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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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카드 교통카드 이용 조회화면임. 본인의 (선불)교통카드도 이런 화면인 줄 오해하지 마시라. ^^;

 카드 이용 현황을 조회해봤는데 이것저것 클릭하다보니 교통카드 이용현황도 나온다. 별 쓸모는 없지만 나름 재미있는 기능이다. 내가 뭘 타고 언제 어디를 갔는지 표시가 된다. 그런데 어쩌면 이리도 규칙적인지. 낙성대역과 삼성역을 오가는 것 외에는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란 말씀.

 물론 어쩌다 어딜 가느라 버스를 탈 때도 있고 주말에는 평소와 다른 행선지로(주로 신촌에 합창연습하러) 가는 경우도 있다. 다만 교통카드 이용현황에 찍힌 나의 행선지가 곧 나의 평소 삶을 말해주는 것 같아 재밌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인생이 이런 거야? 같은 곳만 왔다리 갔다리?' 하는 사소한 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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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에 갔던 출장의 첫 행선지는 홍콩이었다. 홍콩에는 볼 일이 없었고 홍콩과 인접한 중국의 대도시 '심천'에 가기 위해서였다. 홍콩에 지난 번에 갔을 때도 겨우 서너시간 스쳐가는 상황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홍콩 공항에서 곧장 중국 국경까지 가는 직행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홍콩에 입국절차를 밟을 때 '체류기간 90일까지'라고 찍어준 도장이 무색하다. 어차피 누가 가도 무비자로 90일 체류 도장을 찍어주는 거지만 왠지 공짜로 얻은 걸 포기하는 듯한 아쉬운 기분.


 매일 회식과 회의를 반복하는 피곤한 일정을 마치고 출장이 끝날 무렵에는 우리나라 출국 도장 옆에 겹쳐서 입국 도장이 찍혔다. 잠깐이든 길게든 외국에 다녀오며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때는 묘한 안도감이 있다. 외국에서 입국심사를 거칠 때는 왠지 아쉬운 입장이 된 듯하고 '무사통과의 은혜'를 내려주십사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 된 기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입국 심사대를 통과할 때는 여권의 녹색 표지를 보고 간단히 검사한 후에 도장을 찍어주는 아저씨가 마치 여행 잘 하고 왔냐는 표정으로 보일 때도 있다.



 교통카드의 이용기록을 보면 삶이 너무 무료해보인다. 그런데 여권에 도장 몇 개 늘어난 걸 보면 그래도 그렇게 지루하게 살고 있진 않다는 안도감(?)이 든다. 교통카드에 단조로운 기록만 남아있을 지언정 그때 그때 나름 재미있게 바쁘게 살았으면서도, 출장 때는 같은 곳을 가다보니 슬슬 단조로움을 느꼈으면서도 그렇다. 사람의 기억은 이토록 불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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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엊그제 점심시간에 서점에 들렀는데 '카불의 사진사'인가 하는 책을 집어들었었다. 프리랜서 사진기자(외래어를 쓰자면 포토저널리스트)가 쓴 책이다. 표지를 넘기니 그 사람이 쓰는 카메라 2대와 렌즈 몇 개를 소개해놨는데 이걸 어떻게 들고 다녔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오늘 저녁에 MBC에서 갠지스 강에 대한 자체제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는데 그걸 보는 동안에도 나는 카메라맨이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찍었을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자이나교 같은 생소한 종교 집단의 의식을 촬영한 장면을 볼 때면 어떻게 양해를 구하고 촬영을 했을까, 저 가운데 서서 카메라를 들고 있기가 얼마나 뻘쭘했을까, 이런 궁금함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엄홍길씨 같은 산악인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더더욱 '저 고산지대에서 카메라 메고 찍으려면 숨이 차서 죽을텐데' 하는 생각부터 든다. 4500미터 고지에서 걷고 숨쉬는 게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카메라는 내 지갑, 열쇠, 핸드폰처럼 외출할 때 늘 챙기는 물건으로 각인되어있다. 카메라와 렌즈를 고르는 중요한 기준이 여행다닐 때 편리한가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내가 사물을 보는 각도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영우가 노래를 들을 때면 악기를 어떻게 썼고 박자는 어떻게 변하고 화음은 어떤 식으로 넣었는지를 곰곰히 구분해가며 듣는 것처럼 나는 카메라를 들고 여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98년에는 춤을 추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물을 판단했었다.)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정리하고, 한편으론 어딘가에서 카메라와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그려보는 식으로 나는 나의 목표들을 꿈꾸고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평범한 일상도 사실은 모두 어딘가로 향하는 길목이다. 방향만 확실하다면 발 밑의 블록만 보고 걸어도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고 계단만 보며 올라가도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다고 표현할 때, 한 칸의 블록과 한 칸의 계단이 '일상'인 셈이다. 나는 삼성동과 낙성대를 수도 없이 오가며 일상을 지나 어딘가로 가고 있다. 목적지가 100% 정해진 건 아니지만 어디쯤인가로 향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의심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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