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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예술평

나이가 들수록 소설, 영화, 음악과 멀어지는 이유

thezine 2010. 2. 8. 23:50

레 미제라블


 '장발장'의 원래 제목이 '레미제라블'이라는 사실, 그리고 '레미 제라블'이 아니라 '레 미제라블'이라는 사실을 안 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다. 그리 풍부하지 않은, 지금 보면 초라한 고등학교 도서관에 비교적 상태가 양호했던 소설책으로 이 책을 처음 만났다. 2권짜리였는데 한 권만 해도 600-700백 페이지는 됐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어찌어찌 더 두꺼운 책을 읽기도 했지만 아무튼 당시 읽었던 책 중엔 가장 두꺼웠던 것 같다.


 그 시절, 생각해보면 내가 프랑스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만화나 소설 속에서 접한 삼총사 이야기, 몽테 크리스토 백작, 괴도 뤼팡, 그리고 위인전기에 나온 키작은 루저-_-; 나폴레옹 이야기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삽화 하나 없는 그 두꺼운 소설책을 읽으면서도 머리 속으로 소설의 배경을 생생하게 그리고 상상할 수 있었다.

 빈민굴의 어두움, 장발장이 촛대를 훔친 낡은 성당의 신부의 표정, 신분을 감추고 자수성가한 장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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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외에도, 몇몇 예술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하고는 팝가수나 외국 영화의 배우, 감독 이름을 읊으며 아는 척을 하는 것도 그 무렵의 취미 생활 중 하나였다. 기껏해야 심야라디오 방송이나 '스크린' 같은 잡지에서 접한 정보가 전부이면서도 친구들 중 몇 몇만 아는 이름을 거론하며 인텔리 행세를 했던 그런 같잖은;;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젠 주5일제에 맞춰 정신력도 주5일제가 된 건지, 어째 예전같이 음악, 영화를 열심히 보고 듣지 않게 됐다. 아무래도 몸과 마음이 피곤한 30대의 처지 때문이겠지.


 그런데 방금 한강변을 산책 겸 운동 겸 달리던 도중 어둡고 그늘진 산책로 주변의 벤치를 보다가 문득 레미제라블 생각이 났다. 그림으로도, 사진으로도 본 적이 없고, 심지어 남들 한 번씩은 다 가는 유럽배낭여행으로도 본 적이 없는 레미제라블의 배경이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소설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그렸던 풍경과 어딘지 모르게 닮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영화를 볼 때나 소설을 읽을 때 특히, 중고등학교 시절의 설레임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이거였나 싶다. 그땐 소설 속의 이야기에, 영화 속의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해도 그때만큼 푹 빠지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영화 속의 이야기가 비극이든 희극이든, 나의 현실이 좋든 싫든 상관없이, 가상의 이야기에 몰입하기에는 이미 인생의 많은 부분이 정해져버렸기 때문에 그만큼 몰입이 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고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소중한 지식들을 얻고 있지만, 한편으론 소설과 영화 속에서 막연하게 존재하던 것들을 직접 겪으면서 현실감각이 발달할수록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기는 어려워진 것 같다.

 예를 들면 고등학생에게 '군대'란 선생님들의 협박 섞인 무용담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지옥이다. 하지만 이제 예비군도 끝난 민방위 신세에게 군시절이란 아득한 추억으로 미화될 지언정 '상상'이 개입할 건덕지는 없는 법이다.




'상상과 환상' 폴더에서 '현실과 경험' 폴더로


 그렇게 성인이 되는 일, 대학에 다니는 일, 군대에 가는 일, 연애를 하는 일, 사회에 발을 딛는 일, 결혼을 하는 일... 사람이 일생에 겪는 중요한 단계를 거칠 때마다 인생의 매 단계는 하나둘씩 '상상과 환상' 폴더에서 '현실과 경험' 폴더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요약하자면 '직접 경험한 게 많아질수록 미지의 경험에 대한 상상과 몰입은 어려워진다'는 게 오늘의 생각이다. 과연 이 생각이 맞는지 아닌지, 다음에 소설책이나 영화를 볼 때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 과연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