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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thezine 2016. 2. 10. 00:55



왕십리(往十里) 
                                              김소월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원래 갑자기 생각난 시는 김소월이 아니라 박목월의 왕십리였다.




왕십리

                                           박목월

내일 모레가 육십인데

나는 너무 무겁다.

나는 너무 느리다.

나는 외도가 지나쳤다.

가도

가도

바람이 입을 막는 왕십리.



우연의 일치인지, 두 시인의 같은 제목 '왕십리'에는 둘 다 '가도, 가도'라는 문구가 나온다. 반복되는 네 글자로 좌절, 피로, 지루함, 회한, 자조.... 여러 감정을 모두 담은 표현이기 때문인 것 같다. 볼 때마다, 보고 있는 중에도 느낌이 달라지는 표현이다.



무학대사가 조선의 도읍을 찾아 발을 디딘 곳이 왕십리라는데, 지도를 찍어보니 왕십리에서 경복궁까지는 20리가 조금 안되는 거리다.




대충 십리쯤 되었다는 이야기인 것인지, 아니면 무학대사가 도착한 곳이 왕십리 로터리가 아닌 더 서쪽의 어디쯤이었거나겠지.





그리고 내가 살았던 '답십리'는 그 유래가 정설이 없고, 몇 가지 다른 설이 있다고 한다. 답십리를 요즘도 거의 매일 지나쳐 출근을 하지만, 학창시절엔 왕십리에서 전철을 갈아타는 일이 잦았다. 왕십리역 통로에 붙어있던 박목월의 '왕십리'는 글자 수가 많지 않아서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외워졌었다.


아직 내일 모레가 육십은 아니지만 나는 너무 무겁고 느려진 것 같다. 소설 '은교'를 읽은 것이 가장 큰 계기였던 것 같긴 한데, 그렇지 않았어도 나이 먹은 것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가도, 가도, 바람이 입을 막는 왕십리'를 되뇌이면, 머릿속에는 추운 바람 속에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회한 섞인 숨을 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주름 깊은 표정이 떠오른다.


휴식이 끝나가서 그런 건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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