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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끄적끄적

죽으러 사는 삶

thezine 2019. 3. 4. 23:50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 한 분은 (선생님들이 보통 그렇듯/그랬듯) 수업 사이 사이 주의를 집중시킬 겸, 혹은 그냥 생각이 나서 수업 외의 이야기를 하셨는데 유독 대화의 주제가 무기력했다. 아마 그 분의 개인적인 스타일이 수업 시간 잡담에서도 드러나서 그럴 것이다. 그 선생님이 이 이야기는 몇 번 반복했던 것 같다.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 너희들 졸업하고 대학 가고 군대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늙고 나면 죽는다. 결국 다 죽으려고 사는 거다.' 이런 이야기. 과정과 종착지에 대해 혼동, 또는 관점을 달리 해서 그런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살다 보니 언젠가는 죽는 것이지, 죽으려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 죽는 게 목적이라면 그 전에라도 언제든 선택의 기회가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연말마다 다녀오는 회사 봉사활동에서는 가정용 생필품인 '김치'를 저소득층에 배달을 했다. 남이 다 만들어준 김치속을 남이 다 절여놓은 배추에 채우는 봉사활동보다는 실질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람마다 무작위로 주어진 주소로 김치를 배달하는데 초인종을 눌러도 답이 없었다. 이럴 경우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보고 문이 열리면 잘 들리게 방문목적을 외치고 현관에 놓고 가라는 안내를 받았기에 그렇게 들어가보았다.

 얼핏 본 방 안에는 작은 티비 선반과 교자상이 살림의 전부였다. 보이지 않는 구석에 뭐가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 단촐한 집에 말도 하지 못하고 눈빛에는 초점이 없는 한 노인이 멍하니 티비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과 최소한의 열량을 공급해주는 허접한 밥상과 티비. 그것이 그 노인의 남은 삶의 전부인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암울한 삶이지만, 그나마 24시간 빛과 소리를 내뿜는 티비가 없었다면, 여기에서 더 나빠졌겠지.

그날 다녀온 곳들은 임대아파트에서도 가장 형편이 어려운 세대들이었는데, 그 중에도 활발하게 뭔가 생활을 이어가는 듯한 사람들도 있었다면, 그 노인은 그날, 아마도 내 동료들이 가본 곳 중에서도 가장 우울한 여명을 보내는 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등학생 시절 생물 선생님의 허무주의적인 '죽으려고 사는 거야'라는 말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그날 본 노인은 어떤 의미도 어떤 기대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삶처럼 보였다. 물론 김치를 놓고 나오는 몇 초 동안 느껴지는 인상일 뿐이고 실제 그 노인의 생활이 어땠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 노인의 실제 삶과는 별개로, 그 순간 느껴진 찰나의 '인상'이, 실제로도 이 노인, 혹은 어떤 누군가의 삶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넓게 보면... 의지와 관계 없이 태어나서, 어릴 땐 먹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 나이가 들면 갖고 싶은 것에 집착하며 살다가 죽기 직전까지도 여러 형태의 욕망을 쫓아다니는 것도 (정말 졸라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인생일 수도 있다. 조금 더 좋은 집에서, 조금 더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며 조금 더 많이 누리다가, 조금 더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서 가느냐... 이 중에 몇 개를 얼마나 더 가졌느냐 차이일 수도 있겠다.

안그래도 줄곧 '삶은 늙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여기에 더 해서 이날 봉사활동 이후로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떠올리곤 한다. 원래 여고괴담인가... 어떤 영화에서 memento mori? 라는 라틴어 문구로 처음 봤던 말이다. 원래 이 말을 만든 이의 뜻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지갑에 돈도 유한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쓸 때 더 귀중하고, 목적성 있게 쓰기 마련이다. 여전히 별다른 액션 없이 하루 버티고 또 하루 버티고 그러다가 잠깐 재밌는 일 찾아보고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한 번씩은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고 주의환기를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그런 뜻인가보다 생각한다. 인생을 그냥 주어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살자는 생각. 이러다 죽기 직전에 '에이 다~~~  소용없다~~~' 그럴지도 모르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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