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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끄적끄적

글 쓰기의 TPO

thezine 2020. 9. 11. 19:06

원래는 옷을 입을 때는 Time시기 Place장소 Occasion상황에 맞게 입으라는 약자인데 글 쓰기에도 적합한 TPO가 있었던 것 같다. 학생시절, 나의 밤시간 루틴은 이랬다.

과음하진 않고(자주 과음할 만큼의 돈도 없었고) 귀가를 했다. 씻고 책상 스탠드에 불을 켜고 컴퓨터를 켰다. 커다란 CRT 모니터였는데 언제 버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탠드 불빛과 적당한 어둠과 모니터와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 적당히 술을 마시다 귀가했기에 피곤하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피곤해도 맑은 정신. 내 주의를 잡아끄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TV도 없었다. (다행히? 나는 TV없이는 못사는 사람은 아니다.)

술이 과하면 감정은 풍부해지지만, 술 취한 사람의 생각이란 것은 취한 사람이 횡설수설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정리되지 않고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생각의 벽돌로 집을 지으려면 술이 취해서는 제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햇빛도 글쓰기에는 도움보다는 방해가 된다.

달라진 상황에서 지금 내가 즐기며 글을 쓰려면 지금 상황에 맞는 TPO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술을 줄인다던지.

다만 그때 그 시절 글을 쓰는 환경이 그랬던 것이지 글을 쓰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은 조그만 PC통신 커뮤니티 안에서 친구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읽고 답글을 쓰던 친구들은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는 친구가 더 많은 것 같다. 종일 같이 놀아놓고도 집에 가서 글로 또 대화하던 친구들과 보냈던 하루. 그런 하루, 다시 또 그렇게 놀고 돌아올 수 있다면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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