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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부터의 도피

thezine 2022. 2. 24. 23:53



한 번에 여러 책을 그때 그때 내키는 대로 조금씩 읽어가는 습관대로, 요즘은 이 두 권을 주로 읽고 있다.

인간 없는 세상 -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진 순간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생태계, 자연 환경, 도시 공간 같은 것들이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상상을 펼치는 책이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각 분야 별로 전문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예상을 펼치는데, 그 밑바탕에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살아온 역사, 지구에 남긴 장기적인 흔적들, 지금 우리의 사는 모습 같은 것들에 대한 사색이 담겨 있다. 국지 분쟁으로 인해 분쟁 당사자 양쪽 모두가 살지 못하게 된 키프로스 섬 해변가 휴양지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이미 현대문명의 손길이 거쳐간 후 불모지가 된 곳의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허감과 호기심과 허무함과 신기함의 다양한 감정이 솟아나기도 한다. (듣기만 해도 호기심이 생겨나는 이곳에 대한 이야기는 위키백과를 읽어보고 거기에서 얻은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면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진들을 찾아볼 수 있다. https://ko.m.wikipedia.org/wiki/%EB%B0%94%EB%A1%9C%EC%8B%9C%EC%95%84)

이순신의 바다- 저자 황현필이라는 사람은 대충 알기로는 원래 교사 출신이고 경찰, 공무원 시험의 한국사 과목 강사로 유명했던 것 같다. 지금은 방송에도 종종 출현하는 유명 유튜버다. 황현필 강사의 유튜브는 역사 이야기 특성 상 (지도나 역사적 인물의 초상화 같은 화면 자료도 종종 등장하지만) 화면 없이 소리만 들어도 이야기의 흐름을 알 수 있어서, 자전거를 타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개는 것 같은 단순한 일을 할 때 종종 듣곤 했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쓴 책이다.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지만, 처음부터 순서대로 앞뒤 사정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정리한 책을 읽는 것은 처음이다. 워낙 큰 사건이자 드라마틱한 요소도 많은 이야기이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부분 아는 이야기임에도) 흥미롭게 읽고 있다. 한편 자잘하게 잘못 알려진 부분을 바로잡으려는 목적도 컸던 것 같다.


아무튼 둘 다 재밌는 책인데, (다행스럽게 '인간 없는 세상'은 번역이 괜찮기도 하고) 어째 요즘은 계속 '인간 없는 세상'만 집어들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승승장구하고 신나게 연전연승하던 시기를 지나서 짜증나는 이유들로 고초를 겪는 갈등의 고조기를 읽는 것은, 재미는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피곤한 일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영화나 소설에서 갈등이 고조되고 폭발하는 그런 장면들은 나는 특히 불편하다.)

반면 '인간없는 세상'은 제목부터가 인간을 배제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장르 자체가 과학 도서로 분류되는, 철학적인 질문을 마구 던져주지만 어쨌든 중심 소재는 지극히 과학적인 책이라서 등장인물의 갈등 같은 불편한 지점이 거의 없다.

요즘 특별히 평소보다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평소에 없던 별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는 게 피곤하긴 피곤한가보다. 자기 전에 잠깐씩 책을 읽는 시간에 인간 없는 세상을 집어 들며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오늘도 이순신의 바다 대신 이 책이 읽고 싶어.',  '강렬하고, 갈등하고,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이렇게 잠깐 주어진 휴식시간에 읽고 싶지는 않아.'

사람의 정신, 정신력, 맑은 정신, 이런 것들이 사람마다 총량은 분명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각자에게 적당한 수준이라는 것을 넘기면 배터리처럼, 잠처럼 꼭 보충이 필요하구나 싶다.

오늘도 평소처럼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책을 집어 들다가 문득 두 책의 차이란 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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