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ZINE

[서평] 혼자 책 읽는 시간 본문

서평&예술평

[서평] 혼자 책 읽는 시간

thezine 2025. 1. 31. 00:53

혼자 책 읽는 시간

 한 번에 읽지 못하고 징하게 오랫동안 나누어 읽은 책들이 몇 권 있다. 정확한 구매 시기는 모르지만 내가 산 초판 18쇄는 19년 12월에 인쇄되었다고 적혀있다. 당시 쓰던 온라인서점 기록이 5년 전까지인데 구매 기록이 없는 걸 보면 20년 1월 30일 이전에 구매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많진 않지만 서점에서 책을 사는 경우도 있어서 잘은 모르겠다.

 

 책을 펼치면 미국의 저렴한 소설책에 쓰는 페이퍼백과 비슷하거나 아주 조금 나은 듯한 재질의 종이가 낡은 느낌을 더해준다. 독후감을 쓸 때면 항상 서점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한 책 표지 사진을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몇 년에 걸쳐 게으름의 시간이 내려앉은 책 표지 사진을 쓰고 싶었다. 이렇게 (다시 한 번 말하면) '징하게' 오래 읽고 있던 책 세 권을 비슷한 시기에 마무리했다. 마음 같아선 이 책 모두 한 번에 독후감을 쓰고 싶지만 시간이 늦었다.

 

 

 

 

 저자는 명문대 출신의 변호사로, 뉴욕 근교에 살던 사람이고, 어릴 때부터 책을 함께 하는 가정에서 자란 것 같다. 그러던 중 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깊은 상실의 시간을 보내다가, 언니가 죽고 3년 정도 지난 후에, 그 상실을 이겨내고자, 1년 동안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으며 삶의 의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영화를 보며 정서를 키우고 사춘기를 보낸 사람처럼, 책을 보며 성장한 사람은 기쁨도 슬픔도 책 속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의 죽음을 겪으며 삶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한 사람이 '그래, 책을 읽겠어' 라고 결정했을 때, '20대에 꼭 해야 하는 세가지'라던가, '수도권 내집마련', '파이썬 쌩초보' 이런 책을 고르진 않았을 것이다.)

 

  책 마지막 부분에 책 365권의 제목이 적혀있다. 들어본 적은 없지만 소설 제목 스러운 제목들이 가장 많다.(시베리아로, 무너지는 것들, 스무 명 소년과의 여름...대부분은 소설인 것 같다.) 어디서 들어본 소설 제목(말리와 나, 레볼루셔너리 로드), 소설일 수도 있지만 에세이 냄새가 물씬 나는 제목(포로생활을 벗어나며, 글 쓰는 삶...)

 

  이 책은 1년간 읽은 책들을 하나 하나 여러 권을 소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 책들 중에서 본인이 꼽은 책들과, 그 책을 재료로 삼아 절망, 로맨스, 동료 관계, 가족 관계(남편의 전처 소생 딸과의 관계 쌓아나가기), 옛 추억 등, 인생의 여러 주제들에 대한 21편의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시작은 언니의 죽음에 얽힌 상실로 시작해서 그와 무관한 인생의 면모들에 대한 주제를 누비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본인 인생에 언니라는 존재가 그랬듯, 저자가 인생의 의미로 꼽았던 독서의 의미를 이야기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저자의 이런 방식이 딱히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영화에 푹 빠져서 위로의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면 좀 더 와닿을 수도 있겠다.

 

 책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내가 고른 책이라고 하면 뭔가 그래도 그 중에는 홍보가 잘 된 책일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18쇄나 인쇄되었다. 1쇄를 넘기지 못하는 책이 대부분이라고 들었는데, 18쇄면 꽤 잘 팔린 편 아닐까 싶다. 한국어 초판이 2012년에 나왔고, 만 6.5년 만에 18쇄면 4-5만부 정도 될까. 그정도면 (이 바닥을 잘 모르지만) 스테디셀러로 꼽을 것 같다.

 

 

 

 

 지난 겨울, 1년 더 지난 언젠가 바스크치즈케이크 맛을 확인하러 들른 연남동 어떤 카페에 이 책을 갖고 갔었다. 책이 가볍고 진도가 느리고, 혼자 카페에서 읽기에는 소설이나 에세이가 좋겠어서 고른 건데, 결과적으로는 인스타용 사진만 남기고 겨울을 한 번 더 보냈다. 이렇게 느리게 읽은 책들은 원샷으로 질주하듯 읽은 책과 달리 다시 앞 부분과 중간 몇 부분은 대충이라도 둘러봐야 한다.

 

 느려도 너~무 느리게 읽은 책이라 많은 부분이 휘발되어버리긴 했는데, 얼마 전에, 예전에 재밌게 읽은 것으로 기억했던 어떤 책을 다시 읽어 보니 도대체 내가 읽었던 게 맞나 싶게 내용이 새롭다. 그러다 인상 깊었던, 그래서 기억이 나는 문구를 마주쳐야 '그래, 그랬지' 할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느리게 한 문장 한 문장 눌러담은 글은, 이미 밀린 책이 많은 상황에서도 다시금 한 번씩 펴보게 만드는 면이 있다. (다만, 이렇게 정서가 담긴 글은 번역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문장이 어색해지고, 번역체가 되고, 그래서 잘 읽히지 않거나 확 깨는 부분이 있다. 나는 한국어 어순에 맞는 의역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돈 받고 번역하는 작업자 입장에서는 대놓고 의역을 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저자의 부모는 다른 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저자는 명절이건 어느 때건 성장기 내내, 특별히 만날 친척이나, 조부모 같은 존재가 없이 가족이 삶의 중심인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소녀에게 친구이자, 멘토이자, 롤모델이었을 언니의 죽음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점을 미리 생각해두면 좋겠다. 가족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지만 개개인과 상황이라는 차이는 있기 마련이니까.

 

 올해는 이런 저런 일이 생겨서 계획보다 짧은 설날 여행을 마치고 왔다. 명절을 지내면 누군가의 건강 문제라던가, 전해 들은 타인의 일이라던가, 가족 구성원이 함께 성장하고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늘 생각할 거리가 생긴다. 이 책을 포함해서 에세이라고 분류되는 책이란 것은 그렇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생을 이해하고 소화해서 '내가 보니까 이렇소' 하고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 죽기 전에 의무적으로 짧게라도 에세이를 쓰라고 한다면, (정리가 잘 되지 않거나 투박할 지언정) 다양하고 재미있는 글들이 태어나 않을까?

 

 

'서평&예술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평] 도해 타이완사(史)  (1) 2025.02.02
[서평] 인간 없는 세상  (0) 2025.02.01
영화 뮌헨  (1) 2024.12.28
[서평] 나는 독일인입니다  (5) 2024.10.28
[서평] 모델  (4) 202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