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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육아일기

thezine 2015. 9. 13. 23:08

주말에 혼자 애 둘을 보는 것은... 이렇다. 쌍동이 부모들 보면 '아 나보다 고수지.' 하고 한 수 접는 마음이 들고, 외동이 키우는 부모들을 보면 (물론 마음 속으로만) '하나는 참... 쉽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둘째는 첫째보다 갓난 아기 시절 사진이 많지 않은 듯 하다. 한두달 지나 목욕을 하며 엄마와 눈을 맞추던 모습이 신기하고 예뻤던 첫째와 달리, 생후 초기 관문을 지나는 모습이 처음처럼 신기하지는 않기 때문인 것도 한 가지 이유겠지. (둘을 다 봐야 하니 사진 찍을 여유가 없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일 테고.)


그러나 아기들도 생후 울고 싸고 자는 것 외에 미묘한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 생기고 나면, 그때부턴 아기의 개성이 조금씩 드러난다. 감정이란 것은 단순히 그 아기의 개인적인 희로애락이 아니고 그 아이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스타일로 사람들을 대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상호적인 것.


할 줄 아는 단어도 몇 개 없지만 행동들을 보다 보면 그 아이의 성격이 드러난다니, 참 웃기고 심각한 진리다. 아기들은 모두 천사라지만, 외모만 놓고 보면 예쁜 아기, 못생긴 아기가 있는 것처럼, 아기의 성격도 사랑받기 좋은 성격이라는 것이 있다. 예민한 게 잘못도 아닌데, 예민한 아기들은 아무래도 두루두루 사랑받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아기가 예민하면 일단 엄마 아빠가 힘들고, 엄마 외엔 안기지도 않고 수시로 울고 보채는 아기를 보면 친지나 친구들도 선뜻 정이 가지 않는 법.


그런 점에서 무슨 덕인지 첫째 둘째 모두 아기때부터 누구든 눈이 마주치면 웃는 아기였고, 그로 인한 소소한 사랑의 기운을 더 많이 받고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처음 보는 아기가 눈이 마주쳤을 때 생글생글 웃으면, 사람들마다 반응은 같지는 않지만 겉으로 얼마나 티를 내느냐 차이일 뿐,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고 예쁘다,귀엽다 한 마디라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아기의 사회성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또 한 가지는, 아기들도 자신이 웃으면 사람들이 마주 웃고 호의적인 제스처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인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아기는 어느샌가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생글생글 웃고나서, '자, 이쯤 되면 같이 웃으면서 예쁘다 한 마디 할 때가 됐지.' 하는 표정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게 느껴진다.


 사람마다 가정과 친지와 친구와 이웃과 환경이 모두 천차만별이니, 아기들마다, 아이들마다, 청소년, 성인마다 그런 호의적인 반응을 접하는 정도가 다를 것이고, 그런 수만 번의 접촉과 피드백을 통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자신감, 기대치, 인생관 같은 것들이 빚어지는 것일 거라 생각한다. (아직 첫째가 만 네 살도 안되었으니 경험으로 증명하기엔 아직 긴 시간이 남았지만.)


 주말에 아이들과 놀아주고 밥을 먹이고, 이렇게저렇게 돌봐주는 일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닌데, 이제 익숙해진 건 있어서,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아직까지는 출장 같은 것 없이 비교적 레귤러하게 지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메뉴를 바꾸어가면서 식사를 챙겨주고 (똑같은 것만 먹이면 잘 안먹으니 귀찮아도 바꿔가면서 먹일 수밖에 없어서) 몇 번씩 씻기고, 새로운 놀이거리도 고민해보고, 손이 많이 가는 둘째에 집중하다보면 어느틈에 첫째에 미안한 마음이 들고, 그래서 둘째가 잘 때 작정하고 첫째와 놀아준다던지. 그런 주말을 보낸지 이제 한달 반 정도.


 오늘도 주말을 무사히...는 아니고, 참치캔에 손을 베긴 했지만 큰 사고는 없이 2주 넘게 끌었던 둘째 감기도 잦아들고, 아이들은 결국 9시 전에 잠이 들었고, 폰에 받아놓은 영화를 보던 중 둘째가 울면서 깬다. 영화를 보느라 이어폰을 꼈더니 우는 소리를 늦게 들었다. 침대에서 내려와서 울면서 방문 앞까지 걸어와있는 아이를 번쩍 들어서 안았다. (침대에서 여러 번 떨어지니 잠결에도 조심히 잘 내려오고, 물 묻은 발로 뛰다 벌러덩 몇 번 넘이지니, 목욕 후엔 살금살금 걷는다.)


 그렇게 서럽게 울다가, 내가 얼른 뛰어가서 안아주니 곧바로 내 어깨에 고개를 떨구고 잠을 청한다. 아기들은 특별히 어디가 아프거나 배가 고프거나 한 긴급한 필요가 있는 게 아니라면, 부모가 안아주기만 하는 것으로 모든 고민이 해결되는가보다.


 아기들이 어디서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지르고 망가트리는 수준 이상의 사고도 치지 않았을 것이고... 안아주고 다독이고 낮은 목소리로 달래주면 그 작은 몸둥아리에 깃든 슬픔과 공포가 모두 없어지는 듯 하다.


 둘째와 비교하니 이미 많이 커버린 느낌의 첫째 아이도 때로 악몽이라도 꾸었는지 새벽에 울며 깰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엔 역시 번쩍 안아 엉덩이를 받쳐 안고 등을 토닥이고 심장과 심장이 맞닿은 채로 숨을 고르고 다시 눕히면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자~알 잔다.


 아기들의 그런 단순한 인생이 부러울 수도 있는데, 어쩌면 그 아이들에겐 자다 깼을 때 엄마 아빠가 옆에 없는 것이 그만큼 절실한 공포이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사주지 않은 것이 그만큼 절실히 슬프기 때문일 수도 있다. 쉽게 위로받지만, 그만큼 쉽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라면, 아기의 삶도 아주 쉽지만은 않을 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성장 과정이란 것은, 그때 그때 익숙한 것보다 조금 더 강한 레벨의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을 견뎌내고, 거기에 익숙해지면 다시 더 높은 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하며, 외부의 스트레스에 점점 더 강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인생을 설계하지 않아도, 아기 요람에서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졸업의 모든 과정이 그런 모양새로 사회가 모양을 갖춘 것 같다. 그리고 불행히도 일반적인 스트레스 단계보다 훨씬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운명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서, 둘째 아이는 이제 기저귀가 소변으로 젖고 무거워져도 울지 않는다. 심지어 똥물이 바지에 새도 울지 않는 강한 아기로(?) 크고 있다. (외출 중에 똥물이 바지에 새면 대신 부모가 멘붕에 빠진다.)




 자다 깨서 서럽게 울던 아이가 내 품에서 바로 숨을 고르는 순간,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은 아기 뿐 아니라 부모도 마찬가지다. 내 품에서 쉬는 아기의 뇌속과, 내 아기의 안녕함을 바라보는 부모의 뇌 속에는 아마도 비슷한 호르몬이 뿜어져나올 것 같다. (아직 그런 호르몬은 보고되지 않았다면, 조만간 누군가 그걸 발견할 거다. 그 사람이 이 글을 본다면 그 호르몬은 아이들 이름 이니셜을 따서 MJ호르몬으로 불러주길.)



 원래 주말 마지막 밤에 글을 쓰고 싶었는데, 딱히 글 쓰고 싶은 꺼리가 없어서 영화를 틀었다가, 다시 영화 보던 중 아이를 재우고 와서 영화는 관두고 이 글을 쓴다. 일단 시작했으니 출퇴근길에 짬찜이 보며 완결을 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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