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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끄적끄적

안개 속의 티샷

thezine 2024. 5. 25. 01:31

아침 안개 때문에 앞이 안보여서 밑에 깔린 화살표만 보고 티샷을 한다. .

앞이 안보이는 안개를 보니 영화 미스트 생각이 자동으로 난다. 결말을 보고 '이게 뭐지? 별로다...' 정도의 담담한 감상이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은 '이게 뭐야!! 허무하고 황당하고 이상해!!' 같은 (글로 써놓으면 내가 받은 느낌과 거의 동일한데 느낌표로만 차이를 표현할 수 있는) 감상을 느꼈던 것 같다.

오래 오래 전에도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회사 동료들과 티샷을 했던 적이 있다. 그 땐 11월 찬 공기 때문에 안개가 심했다. 그 땐 화살표 대신 안개 저 편으로 불빛이 느리게 깜빡였다. 고민할 것 없이 그 불빛 방향으로 치면 됐다. 그 때나 오늘이나 생각보다 공은 잘 찾아진다. 보이는 게 없으니 과한 힘을 빼고 무리하지 않아서 그렇다. 페어웨이 모양이나 지형지물 위치도 모르는 채로 치는데 앞에 가보면 대충 예상한 곳 근처에 공이 있다. 말로 설명하고보니 나름 인생의 묘미가 담긴 말 같기도 하다. 우연찮게도 그 때의 동반자들 모두 나중에 타의로 퇴사하신 분들이라 그런지, 그 때의 라운드가 잊혀지지 않는다.

같이 만나서 옛날 이야기 할 일이 없는 인연들과 과거에 있었던 일의 기억은, 다른 사람이 내 기억의 빈칸을 채워주거나 교정되거나 할 기회가 없다. 더 채워지지 않고 듬성듬성한 장면들은, 포토샵 필터를 여러 번 먹인 사진처럼 조금씩 색이 입혀진다. 아마 나의 기억에 남은 그날의 기억조각들은 옛날 원본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날 같이한 분들은 다들 나름 어디선가 그럭저럭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안개 속으로 공을 치려니 그 때 생각이 나서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짙은 안개로 오늘보다 심하게 시야가 나빴지만 불빛은 잘 보였던 것이나 소리없이 느리게 점멸하는 불빛 기억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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