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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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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

thezine 2007. 7. 5.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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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zine.media.daum.net/mega/newsmaker/200707/05/newsmaker/v17333210.html?_RIGHT_COMM=R4

 원래 기사는 우표 수집 취미를 예찬하는 내용이다. 기사의 일부로 지난 주에 우정사업본부에서 헤이그특사100주년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우표에 등장한 세 사람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거기에 찍힌 글은 고종 황제의 위임장이며 고종황제의 서명과 옥새가 찍혀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의 전모를 요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러시아 황제가 극비리에 고종에게 만국평화회의에 대해 알려주고 초청장까지 전달하자 몇 달도 아닌, 회의 개최 1년 전부터 몇 달의 간격을 두고 세 사람은 한국을 출발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비행기와 인터넷으로 어디로든 연결되고 어디에나 삼성과 LG의 광고판을 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닌, 식민지의 국민으로 헤이그까지 향하는 발걸음은 얼마나 어려웠을까.

 이 세 사람은 어렵게 헤이그에 도착했지만. 이미 세계의 열강들은 서로의 식민지 점령을 인정해주고 있었고 일제가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 역시 강대국 정부들이 승인한 뒤였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자주적인 외교권도 인정받을 수 없었고 회의 참석, 발언권도 얻을 수 없었다.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의 대표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그때 특사들의 심정은, 길거리에서 다쳐서 쓰러져 있어도 그 누구도 도와주기는 커녕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조차 듣지 않으려고 거리 밖으로 밀어내는 심정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황제의 미약한 희망이 담긴 명령을 받고, 조국의 외침이라는 무겁고 무거운 사명을 어깨에 짊어졌던 특사들로서는 포기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주장을 담은 공고사를 각국 대표에게 보내고 신문기자단의 국제회의에 참석해서 발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외국어에 능통했던 이위종이 한국의 비참한 처지를 알리는 '한국의 호소'라는 절규를 통해 동감을 이끌어내고 즉석에서 한국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한 울분 끝에 이준은 현지에서 순국했고, 회의가 종료된 후에도 나머지 특사는 유럽을 돌며 외교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이 사건에 크게 분노한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는 한편 한국 침략의 속도를 높였다고 한다.

-------- 역사 설명은 여기까지 (출처 및 더 자세한 내용은 클릭) ---------


 누구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누구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 멀고 먼 이국땅에서 특사들의 심정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그 이야기가 조국을 위해 너무나도 절실하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라면 포기할 수도 있지만 조국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아무리 문전박대를 받아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 어려운 상황에서 강대국들을 찾아다니며 회의참가를 위해 도와줄 것을 절실히 호소하고, 그 호소가 거절당할 때마다 약소국의 서러움과 희망이 하나씩 꺾이는 고통으로 괴로워했을 3명의 특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공고문을 발표하고, 각국 대표들에게 전달하고, 기자단회의에서 열정적으로, 그러나 절실하게 한국인의 호소를 전달했던 특사들의 모습, 절망적인 열정을 상상해본다.



 거의 모든 면에서 100년 전보다 상황은 좋아졌다. 그런데 나는 알 수 없다. 100년 전의 이야기 때문에 왜 슬프고 화가 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