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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출일기

[대만의 가을] 번외편: 여행기를 쓰는 시간

thezine 2007. 11. 5.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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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시적에(?) 편지를 많이 쓴 적이 있다. 서울에 살다 울산에 이사를 갔는데 한창 사춘기 때다보니 친구들 생각도 나고 성격도 예민할 때였기 때문일까. 편지를 쓰고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간이 갈수록 오가는 횟수가 줄어들고 결국엔 편지를 쓸 일이 거의 없게 됐다. 하지만 그땐 비싼 시외전화 외에 유일한 통신 수단이었다. 아름답지 못한 글씨나마, 이런 저런 생각들을 편지에 담아 보내고,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돌아온 어느날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읽고 하는 일이 그땐 내 일상의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자주 쓰다보니, 어느 시간대에 썼느냐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진다는 걸 깨닫게 됐다. 동생들이 잠들고 밤이 깊었을 때 편지를 쓰면, 특히나 유난히 기분이 묘한 날엔 차마 떠올리기 겁나는 쑥스러운 이야기까지 써버리곤 했다.

 내친김에 봉투까지 풀칠해서 냅다 우체통에 넣어버렸을 땐 모르지만 어쩌다 반송된 편지를 읽거나 다음에 부치려고 넣어둔 편지를 읽다가 자잘히 찢어 버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 많이 들었던 이문세의 별밤 같은 류의 라디오 같은 데서 '밤에 쓴 편지는 아침에 보면 쑥스럽잖아요' 하는 멘트를 듣고 그게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었다.



 내일은 월요일. 일단 발동이 걸리면 일주일은 금새 지나간다.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시간은 잘 간다. 평일 저녁 약속도 가끔 생기고 주3회 운동도 하면 금새 주말이 온다. 덕분에 일요일 밤이 되도 아쉬운 기분도 별로 들지 않고, 어릴 때 일요일마다 느꼈던 '숙제 안하고 월요일을 맞는 듯한' 기분도 이젠 없다. (가끔 골아픈 일거리가 집에서까지 생각날 때가 있지만.)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일요일밤이라도 여행기를 쓸라니 밤에 쓴 편지처럼 될까 싶어서 여행기는 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온통 일상탈출, 여행예찬으로만 흐를 것 같아서다.

 직장인, 그리고 누구나 '탈출'을 꿈꾼다. 지리멸렬한 고민들과 구차한 속박들에서 벗어나 '쿨'하게 살고픈 생각. 2007년 그 전부터 이미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제2차 사춘기를 보내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래봐야 1년에 한 번쯤 일본 구경을 하고 오거나 퇴근길에 로또를 사는 정도에서 만족하고 사는 것도 현실이고.



 '도피'와 '탈출'의 경계는 불명확하다. 성공하면 '탈출'이고 실패하면 '도피'라고 한다면 단지 결과로만 이야기하는 꼴이 될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성공한 탈출을 할 수 있는지, 실패하는 도피를 피할 수 있는지 정답은 모르겠다. 어쨌거나 현실을 괴로워하며 고민만 한다면 도피를 꿈꾸는 게 될 것이고, 현실의 끝에서 답이 나온다는 생각으로 현실에 충실하면 되겠다 하는 생각은 든다.


 어떤 만화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나는 20대 후반인데 진로와 인생에 대해 고민이 많다'고 하니 신이 하는 말씀, '원래 그런 거다' 하는, 약간 허무하지만 한편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별로 고민되는 일이 없다면 다행이고, 고민이 있어도 당연한 거라고 하니 좀 편리한 해석이지만 참고는 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