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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출일기

21세기 노마드; 영어 강사

thezine 2008. 5. 18. 22:12

 벌써 아득한 옛날처럼 기억나는 대만,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에서 대학가 술집을 간 적이 있다. 외국까지 나가서 한국 사람 만나서 놀고 싶진 않았지만 밤에 돌아다니자니 만만한 게 한국 사람들이었다. 타이페이가 초행이 아닌 사람이 몇 있었던 덕분에 대학가의 술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서울에선 어디서나 걸어서 5분 거리 안에 맥주집 정도는 있는 것과 비교된다.)

 주로 병맥주를 팔고 분위기는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바였다. 그리고 물론 서양 사람들이 많았지. 그래서 그런지 화장실에는 거의 대부분 영어로 된 낙서들이었다. 읽어보니 영어 강사로 대만에 와있는 미국 사람, 영어 강사로 와있는 미국 외 국가의 사람, 그리고 대만 사람이 한 낙서로 나뉘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매직이 있었으면 한국 사람이 한 낙서가 추가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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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배워라. 양키를 배우진 말고."
(나머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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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지구적 지배에 맞서 싸워라"
"미국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넌 멍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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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집으로 꺼져라. 그래서 그놈의 망할 자유나 맘껏 누려라. xx"
"(위 글을 쓴 사람이) 영어 강사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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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쟁이가 아니다. 그리고 난 미국 사람이 아니다."
"난 미국 사람이지만 부시에 투표하지 않고 고어에게 투표했었다. 난 케리에게 투표했었다."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라" (필자 주: 이라크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구호)

 (이상은 모두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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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여행기 를 쓸 때 빠트린 것 같은데, 대만 화련에 머물때 같은 숙소에 머물던던 영어 강사들을 만난 적이 있다. 특별했던 점은 그 친구들이 한국에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었고 나처럼 추석 연휴를 맞아 대만에 놀러간 사람들이었다는 것. 유스호스텔 주인이 "이 사람도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를 하자 나에게 인사를 하는데 왠지 서로 멋적었다. 한국 어디에서 영어를 가르치냐고 물었더니 '분당'에 있다고 했다. 그 친구들, 어쩌면 지금도 분당 어딘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요점은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을 막론하고 영어 강사를 만나기가 참 쉬워진 것 같다. 티벳 여행을 갔을 때도 가장 자주 만난 사람들이 중국에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출신 국가는 대부분 영국, 아일랜드, 미국이었다. 바야흐로 '영어 강사' 자체가 전세계 곳곳에서, 아니 아시아 곳곳에서 쉽게 눈에 띄는 시대가 온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생각으로, 혹은 할 일이 마땅치 않아서 아시아 국가로 영어를 가르치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런 중에는 영어와는 전혀 무관한 동유럽 같은 나라 출신이 단지 피부가 하얗다는 이유만으로 강사로 일하는 경우도 섞여있다. (어디에선가 루마니아 출신 영어 강사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고보면 서울에서 외국인을 만나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그 중에 상당수는 영어 강사들이었다. 어쩌다 홍대 앞에 클럽에 갔을 때 편의점 앞에서 음료수를 마시다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신촌의 모 술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모두 영어 강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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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강사들 중에는 수준에 한참 미달인 사람들도 많다느니, 마약 유포니, 한국 여자를 쉽게 본다느니 하는, 강사들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사실과 편견이 모두 섞여있을텐데 그런 부분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려는 건 아니다.

 일본에 영어를 가르치는 걸로 먹고 사는 영어권 젊은이들이 많다는 점은 일치감치 전해 들었고, 중국과 한국에도 영어를 가르치는 걸로 기약 없는 청춘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만에 가서도 화장실 낙서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 똑같이 '영어 강사'일 뿐 아니라, 미국 출신과 미국 외 국가 출신으로 나뉘는 것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부시 집권 8년의 가장 큰 부(-)의 유산은 바로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전지구적인 거부감일 것이다. 적과 아군을 편가르기 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우방 국가들에게 충실한 협력자가 될 것을 강요했던 모습이나, 환경보호를 위한, 생존을 위한 협의의 결실인 교토의정서를 거부했던 사실, 국제전범대판소에 미군의 면책을 고집한 사실들은 향후 얼마나 오랫동안 세계 시민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부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라 다시 거론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대만의 한 대학가 술집 화장실 낙서에서 국제시사 칼럼을 읽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었다.

 정해진 '국가' 없이 2천년 동안 세계를 떠돌던 유태인들, 지금은 미국 외의 모든 나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지만 그 전, 정처 없던 처지였을 때의 그들을 가리켜 '노마드'라 했었다. 원래는 유목민이라는 의미지만 일반적으로 '정주민'이 아닌 '체류자', 언제든 떠날지 모를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쩌면 아시아의 영어강사들도 21세기의 노마드로 불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은 다시 미국출신과 비 미국출신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들에 대한 관심은 어쩌다 강사가 사고를 치거나 위조 학력이 이슈가 될 때만 인구에 회자되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머잖아 사회학, 인류학 연구자들이 아시아의 영어 강사라는 특이한 문화 현상에 대한 재미있는 분석서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나저나 영어권에서 태어난 사람들, 특히 피부가 하얀 것들은 참 좋겠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이렇게 일자리가 많으니 말이다. 서울도 서울이지만 지방에서는 원어민 강사를 애타게 찾는 학원 원장들이 오늘도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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