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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예술평

[서평] 고민하는 힘

thezine 2024. 8. 15. 23:48

 

 
 
어쩌다 보니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의 서평(https://thezine.tistory.com/577) 이후 강상중 교수의 책을 다섯 번째로 독후감 겸 서평을 쓰게 됐다.

작가는 재일교포라서 일본어가 더 익숙한 사람이고, 그래서 내가 읽은 책들은 모두 일본어로 쓴 책을 번역한 책인데, 느낌은 원래 한국어로 쓴 책인 것처럼 문체의 느낌이 대체로 비슷하다. 번역자가 그때 그때 다른데도 그런 것은 번역을 잘 한 것인지, 작가의 문체의 특성 덕분인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변화의 시기가 오면, 그 변화의 시기를 가장 먼저 접하고 파도에 올라타는 사람이 있고, 그 변화가 이미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위에 나오는 '마지막 사람들'은 나쓰메 소세키가 겪었던 메이지 유신이라는 변화의 시기에서 뒤늦은 파도를 타게 된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대의 변화라는 건 반복되는 것이고, 그것은 그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커다란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고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앞 세대를 질투할 지언정, 그 시기의 고통에 대해서는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기 마련인 것 같다.
 
 언제 세대는 꿀 빨았다고 말하는 세대 갈등의 전형적인 멘트가 그렇다. 각 세대는 각자의 시대의 십자가와 기회를 함께 짊어지고 살기 마련이라는 유시민 작가의 말이 정답이 아닐까.
 
 

 '마지막 사람들'의 불만이 어떤 심정에서 생겨나는지 이해는 된다. 이 책에서는 파도의 끝자락을 타고 가는 사람들의 느낌, 의식이 어떤 것인지 정의하고 구체화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계절 중에 봄이 가장 힘들다는 말이 나도 깨닫지 못했던 나의(E가 아닌) I 성향의 약한(vulnerable) 부분을 알려준 것 같았다. ㅎㅎ

음... 나두?

핸드폰 편집기에서 글자를 넣었더니 폰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데, 과히 동의할 수 없으나 재밌는 생각 거리다. 나는 젋었을 때 해답이 없는 물음을 많이 고민했던 사람일까? 지금은 (달관한 어른은 아니지만) 옛날보다 해답 없는 물음을 멀리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굉장히(?) 전형적인 표현이기는 하다. 졸업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흔한 말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해야 대학생활 알차게 한다는 소릴 들을 수 있기도 하다.

젊다는 말의 여러 의미. 동안이다, 철이 없다, 생각이 젊다. 건강하다... 대체로 다 좋은 뜻이다. 철이 없다는 뜻조차도 때묻지 않고 순수한 느낌이 포함되어있다. 젊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무조건.

홍상수 영화나 예술영화에서 뜬금없이 삽입한 장면을 마주치는 느낌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싶게 화면이 전환되고 뜬금없는 장면이 삽입되는 경우가 있다. 나쁘게 말하면 흐름과 무관하고 좋게 말하면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던 건가?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건가? 갑자기 의문이 들게 했던 문구.

나의 20대가 건조했는지, 촉촉(?)했는지 그건 이미 지난 일이라 무관한 지난 일의 느낌이고, 다만 이 시를 보들레르가 몇 살에 썼을까가 더 궁금하다. 노년기에 썼다면 더 절절한 느낌이 느껴질 것 같은 느낌

 이 문구에 대한 감상을 적을 때 많이 졸렸던 것 같다. 중언 부언. 아무튼 보들레르가 젊음을 보낸 이후 젊음을 찬미한 것이라면, 이 시가 더 절실하고 아쉽게 느껴지겠다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통틀어 첫째로 꼽고 싶은 구절. 과거의 종교는 개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마을, 부족, 개인이 인지하는 가장 큰 단위의 공동체가 함께 따르는 신념이었다. 그때의 종교와 지금 개인이 다지선다로 선택한 종교는 근본적으로 개인에게조차도 의미가 다르다.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지금도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각자 확실히 결정된 가치의 set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때의 종교에 비하면 훨씬 미세하게 파편화된 관념 조각들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리고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의심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종교처럼, 현대인은 과학의 세례를 받고 영원히 개안(開眼)해버리고 말았다. 영원히 비가역적인 변화다.




종교의 절대적인 권위가 떠난 자리에는 일인종교라... 마음에 팍 와닿네

종교적인 음치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종교적인 감수성이라고 표현하고있다. 분명 개인차가 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스스로의 지성만을 믿고, 부여잡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 아마도 선택이 아닌 천성이겠지.

그렇다고 내가 막스 베버, 나쓰메 소세키처럼 치열하게, 피곤하게 살지는 않지만(못하지만) 어떤 성격이나 천성을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재능이자 독서의 목적.

혹자는 이 표현을 지적인 말장난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내 지성을 믿고 의지하며 살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앞서 거론한 '일인종교'와 모두 같은 말이지만, 종교적인 cliche와 schema를 하나 하나 대입해보면 이렇게 재밌고 기발한 표현이 된다.
 

차안은 현세를 말하고, 피안은 해탈 후의 세계다. 어떤 나쁜 일이든,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액땜'이라는 개념까지 만들어가면서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고 스스로를 속일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커다란 고통들이 있다. 자식을 잃는 고통 같은 것이 그럴 것이고, 범죄자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의 고통이 그럴 것이다. 의미의 피안이란 어떤 개념일까.

무엇을 풀고 떨쳐내야(해탈解脫) 다다를 수 있는 것일까.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시간이 지나 기억에 먼지가 쌓이고 감각이 무뎌질 뿐이었다.
 

  인생의 고통에 대해, 찾기 힘든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서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의 본능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해가 되지 않고 이해의 대상도 아닌 일을 이해하려고 하느라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이다. 하지만 그것을 붙잡고, 부러 피곤하게 살았기에 인간이지 않을까. 그런 것이 고민하는 힘이다.